○ Catholic(1)

*[해부]움베르토 에코 - '장미의 이름'

fireball'Flee 2022. 9. 12. 21:45

 

 

2008. 1. 8.

  THE NAME OF THE ROSE  THE NAME OF THE ROSE THE NAME OF THE ROSE THE NAME OF THE ROSE        

*장미의 이름*

 -------------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

 

 

1. 『장미의 이름』은 어떤 책인가 ?
수도원의 연쇄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한 영민한 수도사의 이야기를 기본 줄거리로 하면서 사상·이념분쟁·새로운 학문에 대한 도전, 인간관계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있고 요한 묵시록 예언이 나오기도 하면서 허무한 종말로 끝맺는 내용이다.

 

2. 『장미의 이름』은 고전적 가치는 무엇인가 ?
(1) 이야기를 잃어버린 20세기 후반 소설과는 달리 이야기를 담은 소설로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2) 중세를 배경으로 함으로써 지적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있다.
(3) 중세 말기와 20세기 말기를 일치시킴으로서 문명비판적 요소가 강하게 풍긴다.

 

3. 『장미의 이름』의 "장미의 이름"은 무슨 뜻인가 ?
(1) 절대적인 진리(장미)도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고 없어지고 이름만이 남는 형상이고 이미지일 뿐이다. 한때 호화찬란했던 수도원이었지만 작품의 마지막에 묘사된 모습은 폐허와 죽음의 형상이었다. 장미가 부귀·영화·영광·권위·세력을 의미한다면 이것은 영원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2) 에코는 호르헤 신부를 통해 그림자 이름뿐인 절대진리(중세진리)에 목숨을 거는 것이 갈등을 일으킨다는 지적(知的) 허무주의(虛無主義)를 보여주었다.
(3) 진리는 공동체 내에서의 약속일 뿐이다. 지식인의 시니컬한 모습을 보여준 작품이다.

 

4. 14세기 수도원을 배경으로 설정한 이유와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가 ?
(1) 에코는 14세기 중세를 상징·은유·기호의 보고(寶庫)와 문학의 무한한 상상력을 펼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중세를 배경으로 작품을 전개한 것이다.
(2) 14세기의 상징적 의미는 유럽의 전환기와 중세 학자의 종말론적 분위기를 20세기 말의 분위기와 연관시키려 한 것이다.

 

5. 『장미의 이름』의 시대적 배경은 무엇이었는가 ?
(1) 14세기 유럽은 전환기였고 새로운 사조가 움트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중세를 암흑기라고 표현한 것은 다분히 계몽주의자들의 의도로 보인다.
(2) 14세기 유럽의 종교적 상황은 복잡하였다. 프랑스 황제(필립)가 강권으로 교황을 3대에 걸쳐 아비뇽에 유폐시켰다. 이를 반대한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를 교황이 파문시켜 교회와 국왕은 대립하게 되었다. 이때 베네딕트파와 프란체스코파는 교황과 황제를 각각 지지하면서 정쟁(政爭)에 휘말리게 되었다. 신권(神權)의 상징인 교황과 속권(俗權)의 상징인 황제의 대립인 것이다.

 

6. 『장미의 이름』에 탐정소설적 구성을 의도적으로 도입한 이유는 무엇인가 ?
(1) 에코는 기호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전개했기 때문에 자연히 탐정소설적, 수사적 구성이 되었다.
(2) 『장미의 이름』을 아드소의 회고담을 에코 자신이 번역해 놓은 것이라는 독특한 구성방법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
작가가 원래 있던 작품(이야기, 설화 등)을 옮겨 놓았을 뿐이라는 구성방법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도 잘 나타난다. 여러 작가들이 이미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구성방법은 작품이 사실인지 허구인지를 혼동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소설적 요소를 지니게 한다. 이를 통해서 긴장과 흥미를 크게 할 수 있는 것이다.

 

7. 『장미의 이름』의 주인공 윌리엄을 영국인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
14세기 이탈리아는 아랍의 자연과학과 영국의 경험주의적 사상을 받아들임으로써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되었다. 이러한 이탈리아에 영국인으로 하여금 경험주의적 사고를 갖춘 윌리엄이 이탈리아의 무지와 독선을 깨우쳐주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설정된 것이다.

 

8. 호르헤 신부가 "웃음" 때문에 연쇄살인을 저지른 이유는 무엇인가 ?
(1) 호르헤 신부는 인간은 웃음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웃음, 즉 현세의 행복이 신의 은총이라는 르네상스 철학에 대해 중세의 경건주의와 어긋나므로 반대한 것이다. 현실을 즐기자는 것은 교회의 엄숙주의와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둘째 권 『희극』(첫째 권은 『비극』임)을 금기했고 이 책을 열람할 경우 독약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2) 인간의 행복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적 지식이 필요한 데, 이것은 전통적인 중세의 철학에 위배되므로 반대한 것이다. 당시에 이미 지동설, 창조론 등이 싹트기 시작하여 스콜라 철학에 저항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철저하게 막았던 것이다.
(3) 웃음 자체로 본다면 웃음은 권위에 대한 우롱(愚弄), 권력에 대한 풍자 등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9. 아르소가 처녀와 사랑(정사)를 나누고 나서 번민하는 모습의 의미는 ?
(1) 중세의 여성관은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이다. 여성을 형이상학적 인물로 보았기 때문에 여성과의 성행위를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치부하였다. 여성은 신성하며 예수가 부활하여 처음 만난 사람도 여성이었다.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베아트리체 같은 사람이다.
(2) 르네상스의 여성관은 남성과 대비되는 또 하나의 성(性)이라는 인식이었다. 따라서 남녀간의 사랑이 문학의 소재가 되면서 찬미되기 시작하였다. 복카치오의 『데카메론』이 대표적인 경우라 볼 수 있다.
(3) 수도원의 수도사도 이성과 욕정이 있는 하나의 인격체(인간)에 불과하므로 실수를 부분적으로 용납할 수 있다. 따라서 아드소의 정사(情事) 실수도 용인되는 것이다. 자신의 범죄에 대하여 지나치게 번민하는 아드소와는 달리 윌리엄의 태도는 매우 관용적(寬容的)이다. 실수는 할 수 있지만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 대목이다.

 

10. 『장미의 이름』에서 가장 중심적 갈등 양상은 무엇인가 ?
(1) 중심 갈등 - 윌리엄 : 호르헤 신부
(2) 보조 갈등 - 윌리엄 : 베르나르 귀 심판관
이러한 두 개의 갈등축이 대등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사실은 같은 차원이다.

 

11. 주요 등장 인물의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가 ?
(1) 윌리엄 수도사 - 르네상스를 수용하고 전파하는 인물로 인문주의자이면서 안경이라든지 약초라든지 하는 것을 이용한 자연과학을 수용한 근대적 성격을 지닌다. 청빈과 금욕의 상징인 프란체스코 교파를 대변하고 있다.
(2) 호르헤 신부 - 수도원의 최고 책임자로서 인문주의를 거부한 중세적인 교조주의자이면서 호교론적(護敎論的) 인물이다. 중세적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거는 권위에 가득찬 인물이다.
(3) 베르나르 귀 - 교황청에서 파견된 이단교 심판관으로 세속적, 중세적 인물이다. 잔다르크의 죽음에서 보듯이, 마녀 사냥과 마녀 재판으로 이단을 처단하고 있다. 교황권이 강할 때 이단심판은 적었고 교황권이 약할 때 이단심판은 많았다. 이단은 결국 이단을 낳는다. 이단도 세력을 얻으면 정통이 되고 이단이 이단을 물리치면 정통이 된다.

 

12. 『장미의 이름』에서 수도원의 첫인상을 통해 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
수도원에 대한 첫인상은 두려움과 거북살스러움이었다. 이를 통해 비극적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감과 비극적인 종말로 마무리될 것이라는 암시를 하고 있다.

 

13. 프란체스코 교파는 어떤 경향을 지녔는가 ?
성 프란체스코(1182∼1226)가 만든 수도회로서 청빈(淸貧) 사상을 기조로 하고 있다. 없는 자의 교회가 아니라 있는 자의 교회로 변질되는 현실에 대항하여 교회의 쇄신을 강조하였고, 무소유를 주장하였다. 예수의 허름한 옷을 상징으로 받아들여 빈자를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청빈논쟁을 전개하였다.

 

14. 『장미의 이름』에 나타나는 기호학의 개념틀은 무엇인가 ?
(1) 기호학 이론에 대한 해설이 곳곳에 나오는데 이것 자체로도 훌륭한 기호학 이론서가 된다.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 바로 에코 자신의 기호학 이론을 실천하는 곳이다.
(2) 에코 자신의 문학이론을 상상력이 무한한 공간인 문학의 틀에서 구현해 본 작품이다.

 

15. 기호학은 무엇이며, 에코의 기호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
(1) 소쉬르에 따르면, 인간의 의사전달에 사용되는 모든 부호·약속·규약을 기호라고 한다. 이것을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기호학이다.
(2) 에코의 기호학은 소쉬르의 언어학을 따르고 있는데, "언어도 기호의 일종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구조주의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1915∼1980)는 "기호도 언어로 해석되어질 때 기호로서 가치가 있다."라고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16. 기호를 통해서 에코가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
기호는 시간과 공간에 의해 변화하는 언어와 달리 영원 불변적으로 남기 때문에 기호의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에코는 주장한다.

 

17. 『장미의 이름』을 통해 기호학을 대중화한 에코의 의도는 무엇인가 ?
자신이 사용하는 기호의 의미를 정확히 앎으로써 편중된 지식에서 벗어나 균형잡힌 사고 체계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언어의 유희에 빠지지 않도록 기호의 심층적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지식의 독단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고 에코는 주장한다.

 

18. 『장미의 이름』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는 ?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에 부합하기는 하지만, 유럽에서는 "네오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식과 진리의 상대주의로서 해체주의라는 측면에서는 일치하기도 한다. 지식이란 당시의 주된 사상이며 매너리즘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었다. 광기와 신앙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THE NAME OF THE ROSE / Umberto Eco

 

https://youtu.be/25SZqk2P6GY

 

 

1. 작품읽기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은 한 사람의 일대기를 쓴 작품으로서,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327년 성자와 이단자가 공존하는 북부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이다. 이 글의 주요 인물은 윌리암 신부와 그의 조수이자 이 글의 화자(話子)인 아드소이다. 이 글은 종교적인 내용을 주로 하고 있으며, 주변 인물들 또한 모두 종교적인 빛깔을 띄고 있다. 또한 이 글은 철학적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그 사상은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상의 바탕이 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다.

 이 글의 사건의 발단은 사본사 아델모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델모 수도승의 죽음은 수도사들에게 커다란 정신적 동요를 일으키게 되었는데, 윌리암 신부는 이 수도원에 방문하자마자 이 죽음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조사하였다. 윌리암 신부는 추리력이 뛰어난 인물로 보여지며, 그가 추리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한 예가 바로 처음 간 수도원에서 화장실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탐닉하였고 합리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기 때문에 이것이 나중에 사건을 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우베르티노 신부는 수도원에 악마가 있어서 아델모 신부가 죽었다고 하며 묵시록의 예언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윌리암 신부는 아델모 신부가 자살이라고 하였는데, 최고의 그리스어 번역승이며 아리스토텔레스를 번역하던 베난찌오 수도승이 돼지우리에서 죽은 이후 이 사건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죽은 두명의 수도승의 공통점은 모두 사본실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윌리암 신부는 사본사 아델모가 주검이 되어 발견된 장소에서 범인에 대한 단서를 수집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눈 위의 발자국이었다. 그 발자국은 뒷발꿈치가 더 깊이 들어가 있었는데, 아마도 그것은 들키지 않기 위해 뒷걸음으로 걸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신발 자국 역시 사건에 단서로 남게 된다. 사본실에서 죽은 사본사들이 일하던 자리를 조사하던 중에 발견한 사실은 이들이 모두 희극을 번역하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윌리암 신부는 호르헤 신부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윌리암 신부의 빈틈없는 언변에 호르헤 신부는 고함으로 말문을 막았다. 논쟁의 원인은 성직자는 웃어서는 안된다는 호르헤 신부의 주장을 윌리암 신부가 반대되는 말로 대항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호르헤 신부의 주장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기서 가장 인상깊게 남는 윌리암 신부의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원숭이는 웃지 않는다. 웃는 것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뿐이다."라는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사람 이외에는 웃을 수 있는 동물이 없는 것 같다. 웃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생리적 현상인데, 어찌 성직자라고 해서 웃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여기까지 나온 인물들 중에서 범인으로 지목되는 자는 다음과 같다

 ① 우베르티노 신부 … 수도원에 악마가 있다고 함
 ② 호르헤 신부 ……… 너무 독단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것으로 보여지며 성직자는 절대로 웃어서는 안 된다고 믿음 지식은 돌고 도는 것                                   이므로 새로운 지식이란 생길 수가 없다고 믿음
 ③ 말라키아 신부 …… 윌리암 신부의 행동을 뒤에서 계속 감시함
 ④ 베렝가 신부 ……… 사본실에서 윌리암 신부가 그리스어 번역승이 번역하던 책을 보려고 하자 이를 저지함
 ⑤ 살바토레 신부 …… 돌치노파이며 윌리암 신부를 죽이려다 실패함 혐호스러운 얼굴의 소유자

 여기까지 나온 단서로는
첫째, 수도승은 웃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며,
둘째는 희극론의 최대 결정판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1권이 이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열쇠이다.
 윌리암 신부는 사본실의 책이 너무 적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탑 속에 책들이 더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탑 속에 들어가려고 시도를 하였다. 탑 속에서 그리스어 번역승이 번역하던 책(레몬즙으로 씌어진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뚱뚱한 수도승 베렝가가 그리스어 번역승이 번역하던 책을 가지고 도주하였다. 그래서 앗사는 베렝가를 뒤�다가 이름 모를 여인을 만나게 된다. 살바토레는 윌리암 신부를 살해하려다 윌리암 신부에게 잡히며 아델모 신부가 사본을 번역사 베나티우스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자백한다. 그러던 중, 이상하게도 묵시록의 예언에 따라 베렝가는 죽게 된다. 이� 베렝가의 혀와 손에는 검은 잉크가 묻어 있었다. 이단 심문관인 베르나르 드 귀 신부가 옴에 따라 윌리암 신부는 사건에서 손을 떼도록 명령을 받았지만 윌리암 신부는 이 사건에 이상한 점을 느껴서 수도원의 지하실로 가는 통로를 찾기에 이르렀다. 윌리암 신부의 추리력 덕택에 지하실로 가는 통로는 쉽게 찾을 수 있었으며 그 지하실은 감 추어진 서고로 가는 통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드디어 서고에 들어간 윌리암 신부는 그 서고가 기독교계 최고의 도서관이라며 자못 감탄을 금치 못해한다. 서고에서 나온 윌리암 신부와 앗소는 앗소가 전에 만난 그 여인이 악마로 몰리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 여인이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윌리암 신부는 심문관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면 이단으로 단죄되기 때문에 손을 쓰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악법도 법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일치하는 말이다.

 아마도 작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윌리암 신부가 신봉한다는 이유를 토대로 이렇게 서술했을겄이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14세기)에는 심문관의 권한이 지금의 헌법재판소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여인을 악마로 몰아 버리는 것은 참으로 엉뚱하지 않은가? 그 당시 사람들도 그것이 엉뚱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것에 대항하지 못했던 이유는 강자와 약자 사이에 일어나는 먹이연쇄와도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소수의 교황청의 권위가 다수의 빈민층보다 높았던 원인은 무었일까? 아마도 그것은 가진자의 횡포와 상통하지 않을까?

 아무튼 윌리암 신부는 심문관의 판결은 인정하지만, 의문의 죽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발언을 하였기 �문에 심문관의 권위에 도전하였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약초학자 세베리우스 신부는 윌리암 신부에게 베렝가 신부가 죽기전에 숨겨둔 책의 위치를 가르쳐준 후에 살해되게 된다. 그런데 세베리우스 신부를 죽인 말라키아 신부 역시 책을 읽다 혀와 손끝이 검게 변하여 죽었다. 왜 죽었을까? 지금까지 죽은 4명의 신부중에 3명이 혀와 손끝이 검게 변하여 죽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누군가가 그 책에 독약을 발라 놓았기 �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의문의 죽음이 계속되자 윌리암 신부는 이단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 � 윌리암 신부는 지하실의 서고로 가는 통로를 통해서, 비밀스러운 방의 그의 날카로운 추리력과 지식으로 암호를 풀고 들어가게 되었다.

 그 방에는 호르헤 신부가 있었으며 호르헤 신부는 윌리암 신부에게 그 의문의 책을 읽으라고 시켰다. 그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 이었으며, 의문의 죽음의 원인이 책 표지에 묻어 있는 독약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윌리암 신부는 장갑을 끼고 그 책을 읽는다. 호르헤 신부는 윌리암 신부가 죽지 않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을 가지고 사라졌다. 호르헤 신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의 표지를 먹으며 불바다가 되어가는 서고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며, 억울하게 한 여인을 악마로 몰아 세운 심문관은 불공정한 심판을 했다는 이유로 빈민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글의 내용 중에서 호르헤 신부가 웃음을 싫어하는 이유는 웃음이 두려움을 없앤다는 이유에서 였다. 그랬기 �문에 재치가 넘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싫어 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웃음이 두려움을 없앤다? 호르헤 신부는 두려움이 없다면 종교의 존재가 무의미 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는 것을 금기 시켰는지도 모른다. 모든 종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교는 의지가 약할때 인간에게 어떤 힘을 주는 것 같다. 그것을 입증해주는 가증 큰 예가 조선 말기에 우리나라 중하민층에 퍼졌던 천주교이다. 당시의 중하민층은 계급의 구분이 없이 모든 사람이 다 평등한 천주교를 믿기에 이르렀던 겄이다. 하지만 웃음이 존재한다고 해서 호르헤 신부의 말처럼 종교의 존재가 사라져 버릴까?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세상이 웃음이 없이 고통만이 있다면 그것이 살만한 세상인가? 그렇다면 종교적 절대자의 역할은 무었인가? 그 절대자가 아무리 막강한 힘을 가졌다고 할 지라도, 아무리 세상을 평온하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 절대자가 만든 소산이 결국 고통뿐이라면 그 절대자는 아무런 일도 안한 겄이나 마찬가지 이기 �문이다. 정말로 살기 좋은 세상이란 좋은일이 나쁜일 보다  더 많은 세상을 가르키는 겄이다. 즉 우는 일보다 웃는 일이 더욱 많은 세상을 일컫는 겄이다.

 이 글에서 호르헤 신부가 말하던 '지식은 돌고 돈다'는 말은 새로운 지식을 거부한다는 의미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호르에 신부는 이말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식은 돌고 도는 것이므로, 과거의 지식을 반복해서 배우기만 하면된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반발하는 {New Age}적 발상 이지만, 인공위성으로 우주를 탐험하며 날로 발전하는 오늘날같은 과학기술시대에는 어림반푼어치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루가 멀다하고 새롭게 나오는 과학이론이 돌고 돌아서 나온 지식의 소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하기 �문이다. 옛날 사람들이 {고집적회로}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아마도 {회로}라는 단어 조차 상상할수도 없었을 겄이다. 이 글의 사상적 바탕이 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New Age}적 발상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진정으로 사물을 알기 위해서는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라는 사상을 학문의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글에 등장하는 윌리암 신부같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었다. '경험이 중요하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면 그 경험이 과거의 경험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경험이란 미지의 사실에 대한 도전이라고 볼수도 있다. 자연과학을 예로 들자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땅까지 떨어지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는지, 비 오는날 치는 번개가 어떤 물체를 가장 좋아하는지 등등. 이런 사실은 실험을 통해서 이론으로 증명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런 자연과학적인 이론을 실험이 없이 말로만 입증하려 한다면 그 누가 그 이론을 믿겠는가?

 이 글 {장미의 이름}에 내포된 사상은 아마도 이런 것 같다.

세상은 정체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세상은 끊임없는 변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인간은 세상을 더욱 인간이 살기 좋게 변화시켜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소수의 안정과 평화 보다는 다수의 안정과 평화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진정한 세상인 겄이다. 만약에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려 한다면, 제아무리 소수의 힘이 막강하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당연히 다수의 반발이 일어날 겄이다. 김 영삼 대통령의 개혁 정치가 지금은 순탄한 길을 걷고 있지만, 만일 그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민들을 이용하려 한다면 많은 국민들의 반발을 일으키게 될 겄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국민을 위한정치를 하고 있다고 평가 받고 있다.

 끊임없이 변하는 20세기의 후반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21세기 첨단과학시대에 적응할수 있도록 앞으로도 많은 지식을 익히고 습득해야 할겄이다. 또한 윌리암 신부같은 끊임없는 탐구정신이 우리나라의 과학자들에게 가득차서 21세기에는 우리나라가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어 있기를 기원한다.

 

2. 『장미의 이름』의 허와 실

 최   저는 이 작품이 탐정소설로만 읽히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대중소설이기에는 너무 어려운 문제를 다루는 작품이고 쿤데라의 사색조와는 비교가 안되게 유럽문화를 형성한 철학적 논의의 장을 열고 있는 작품이라고 봐요. 영화가 마치 그 중의 알아볼 만한 부분에 밑줄을 그어주듯이 재현해주었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어려운 부분을 참고 읽게 만드는 면이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도 영화 덕을 본 작품이죠. 물론 지적 유희도 없지 않지만, 일생을 문화기호론자이자 문학이론가로 보낸 사람이 소설을 쓸 때 그가 누적한 세상독법을 끝까지 밀고나가 보고 싶은 작가적 욕구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성   일반 독자들에게 수용되는 측면에서 우리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을 짚고 넘어갈 건 짚고 넘어가죠.

 최   이 작품이 무대로 하고 있는 14세기는 어찌 보면 세계의 기호적 재현이 아주 복합적으로 태어나는 시기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 같아요. 그것은 종교적 이데올로기와 세계관에 대한 논쟁이 복합적으로 제기되는 지점이라는 말과 같겠지요. 그 논의의 방대함과 다양함을 잘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 이 작품은 주인공을 통해 단지 질문만을 던질 뿐입니다. 소설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을 품어온 서구의 최근 분위기에서 소설을 쓰는 자의 입장은 매우 불편했을 것입니다. 이때 대답을 주는 인물이 아니라 질문만을 던지는 주인공이 태어나는 것이 아닐지요. 윌리엄은 마치 14세기에 서구에서 일어났던 기독교와 철학과의 관계, 타락한 심판자, 성경 외적 지식에 대한 탄압, 성경의 번역을 둘러싼 세계해석의 문제 등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서 결과적으로는 당대 기독교문화의 어떤 맥락에 대한 매서운 비판이 은연중에 드러나요.

 설   독점적 지식의 횡포랄까 그런 것에 대한 비판은 일정하게 사줄 만하지요. 그런데, 기호 얘기를 하셨지만, 기호를 굳이 거론해야 작품의 중요한 측면들이 부각되는 건지, 전 그게 좀 의문스러워요. 예컨대 바로 도입부에서 당나귀 발자국을 보고 윌리엄이 자기가 그 당나귀 이름을 알아맞춘 과정을 기호 개념을 동원해 설명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건 사실 탐정소설에서 흔히 단서라든가 추리라는 용어로 다 써먹은 거잖아요? 그걸 구태여 기호학 운운 하면서 의미부여를 하는 게 전 좀 어리둥절했어요. 기호학이 이 작품에서 하는 구실이 어떤 걸까요?

 최   기호의 작동을 통해 세상을 보는 에꼬의 시선이, 그의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 이 작품의 서술구조를 만들었다고 보는데, 서술이 이 작품의 열쇠인 듯 합니다. 잠정적으로 제시되는 답변은 모두 그른 반면에 이 작품

에서는 질문만이 옳다고 얘기하면 어떨 지요. 14세기 이후 약 6세기에 걸쳐서 축조되고 또 재축조되면서 조금씩 답변될 철학적 답론들에 대한 질문을 이 작품은 바로 14세기의 질문처럼 한자리에 모읍니다. 실제로 그런 질문을 던질 여지들이 이미 그 시기에 산발적으로 나타나 있기도 했겠지요.

 설  사실, 작품의 전체적인 구도와 세부적인 대목대목에 기호학자의 관심이 스며 있는 건 분명하다고 생각돼요. 그런데 그런 면을 너무 의식하다보면 정작 봐야 할 게 안 보일 수도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죠. 상업적으로 그 면을 은근히 부각시키는 경향도 없잖은 것 같은데, 자칫하면 독자들을 미망에 빠뜨릴 수도 있지 않겠어요? (웃음)

 최  글쎄 에꼬가 꼭 상업성을 고려해 그 면을 부각시켰다기보다는 그의 성향의 결과겠지요,  유럽에서의 그의 오랜 명성이 작품의 유통에 도움을 준 점은 있겠지요.  오히려 대중성의 측면은 이 작품의 여러 층의 대중에게 여러 독법으로 읽힐 가능성의 여지를 주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설  그렇죠. 여러 층의 독자들을 끌어당길 요소가 있다, 바로 그 점도 한번 짚어보죠. 제가 잘 아는 교수 몇 분이 이 소설을 호평하시기에 제가 물어봤어요, 어떤 점이 좋으냐구요. 그랬더니 이유가 몇 가지 있더군요. 하나는 그 안에 방대한 문헌학적 인용이 담겨 있다는 거죠.

 최  그 안에는 그만큼 가짜 인용도 많고 그의 박학이 유머러스한 여유를 가진 것도 사실입니다.

 설  두 번째 이유는 여러 가지 코드로 읽힐 수 있다는 거였어요. 지금 최선생님이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논리일 텐데 저는 그 점을 이모저모 검토해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여러 독자층에게 동시에 읽힌다고 하는데, 문제는 여러 독자층에게 동시에 읽히면서 독자층마다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고 했을 때 그게 반드시 바람직한 것인지는 따져볼 문제라고 봐요. 문학에 깊은 관심이 없는 독자는 추리소설로 받아들이고 관심 있는 독자는 학문적인 관심이나 문학적인 관심으로 읽는다고 했을 때, 만약 그 둘을 결합하는 접점이 헐겁다면 문제 있는 작품일 가능성이 없지 않을 테죠. 뭐, 반드시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 점을 한번 짚어보자는 겁니다.

 최  우리 독자들에게는 영화 때문에 분명히 추리소설로 읽혔을 가능성이 많겠죠. 게다가 우리에게 기독교적 세계관은 무의식의 수준에 이를 정도로 중요하지 않은데다가 기독교적 지식과의 대립에서 수많은 담론이 태어나는 그들의 역사와는 엄연히 거리가 있으니까요.

 설  제 얘기는 이 작품에 추리 소설적 관심과 문헌학적,역사적 관심이 온전히 통일되지 않은 채 절충적으로 병존하고 있다면, 이건 일종의 양다리 걸치기 아니냐, 이쪽에도 추파를 던지고 저쪽에도 추파를 던지는, 뭐 그런 셈 아니냐는 거죠.

 최  문헌학적,역사적 지식을 적당히 장식해서 만들어진 추리소설이 서구에는 숱하게 많지만 이 작품의 경우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추리화되어 있는 것은 연쇄살인 사건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추리-어원적 의미로서의-는 담론의 추리지요. 기독교계의 비리, 기독교 분파 사이의 권력관계, 아리스토텔레스적 지식과 성경적 지식의 대립등에 던지는 질문에 대한 추리가 윌리엄을 따라 독자의 몫으로 남으니까요.

 성  그런데 전 이 소설이 추리소설 기법을 원용한 탓에 허술해진 구석도 없진 않다고 생각하는 편인데요. 좀 지엽적인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서고가 불타기 직전, 범인이 호르헤르도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와 윌리엄이 최종적으로 맞딱드리는 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윌리엄이 호르헤에게 이건 어찌된 거고 저건 어찌된 거냐고 묻고 또 헤르호가 득의에 차서 자상히 답하고 하는 과정이 장황하게 이어지는데, 사실 웬만한 독자는 다 알고 있는 얘길 두 사람이 주고받거든요. 결과적으로 작품의 파국에 해당하는 부분이 늘어지는 느낌이 들더군요. 말하자면 추리소설의 장르적 타성이 발목을 잡은 거죠. 아마 추리기법을 사용한 데서 오는 문제는 잘 따져보면 이것 말고도 또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설  영화 애길 하셨는데, 마지막 부분 처리가 재미있어요. 소설에서는 수도원이 불타자 종교재판관 일당이 탈없이 수도원을 벗어나는 걸로 돼 있는데, 영화에선 사하촌 민중들이 재판관 일당이 탄 마차를 뜬금없이 기습하고, 심지어 화형 당할 여자를 구하잖아요? 그리고는 그 여자와 앗소가 포옹까지 해가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는 멜로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처리되죠. 전 그걸 보면서 영화를 너무 처절하게 끝내지 않아야겠다는 헐리우드 특유의 상업주의적인 계산이 소설에서는 패배로 끝난 과거사실들만 처리돼버린 민중의 저항을 현재진행형으로 살려놓았구나, 하고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어요. 영화의 그런 처리가 물론 실감은 없어요. 요컨대 저는 중세에서 자본주의를 거쳐가는 역사적 변화의 과정에서 민중들이 담당했던 역할을 꿰고 있는 현대의 작가가, 이미 자본주의적 기운이 싹튼 14세기 이태리를 소설로 다루면서 당대 민중들의 모습을 거의 철저하게 무력한 존재로 그렸다는 걸 어떻게 봐야 하는 건가, 이런 문제도 던져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출신배경으로 봐서 수도원 안에서 유일하게 하층민중에 속한다고 할 살바토레는 외모부터 기형적이잖아요?

 

 

*** 인식과 존재의 틈바구니

1. 변명

 필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움베르토 에코와 90년대 한국 작가의 작품에 드러난 감수성의 관계를 살피는 일이다. 이 일을 제대로 하자면, 에코와 그의 작품세계에 정통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 서양의 문화적 현실에 놓인 에코의 무엇이 9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 작가의 미적 감성과 관련되고, 그런 반응이 우리 소설의 어떤 가능성을 예고하는 것인가를 광범위하게 확인하고 세심하게 검증해야 할 터이다. 이 정도의 전제로도, 한국 현대문학의 일부를 귀동냥하고 있을 뿐인 필자는 이번 과제의 적임자가 아님이 분명해진다. 이 글에서 필자는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측면과 연관시켜,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과 구효서의 『비밀의 문』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 두 소설을 선택한 것은 내부 이야기를 끌어내는 액자 형태의 유사성, 소설의 구성방식이나 그 과정을 의식적으로 드러낸 점, 추리기법 혹은 탐색의 모티프를 원용하고 있는 점, 그 탐색의 대상이 앎(지식, 혹은 인식)이며 그것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서책과 관련된다는 점, 사건이 완결되고 난 뒤의 회고거나 성장소설의 형태를 취한 점 등에 그 이유가 있다. 물론 여기서 필자가 표절이나 베껴먹기를 거론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90년을 전후하면서 이미 우리 사회가 이전의 견고한 신념체계나 거대서사의 동요를 경험하고 있었던 점, 상품의 생산과 소비가 가속화되고, 물류와 자본의 시공간적 거리가 급격히 소멸하고 있는 상황에서 문화적 차이 또한 쉽사리 붕괴된다는 점, 따라서 『장미의 이름』이 다른 시대에서라면 불가능한, 우리 문학의 감수성을 혁신하거나 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모색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음을 미리 지적해둔다. 또 이런 유사성 가운데는 부분적 지엽적인 것도 있다. 그래서 이 글은 이인화 구효서의 두 소설을 검토하되, 앎과 관련된 인식상의 문제, 세계의 존재와 관련된 문제, 소설의 생산 및 소비와 관련된 대중성의 문제 등 제한적인 범위만을 살피고자 한다.

 

2. 인식의 불확실성

 서영채의 정교한 분석과 해석에 따르면,1) 『장미의 이름』에서 탐색 대상은 금단의 지식이며, 그 지식을 찾으려는 탐정 윌리엄의 이성주의와 지식을 숨기려는 적대자 요르게의 신앙주의가 대결한다. 그러나 선한 탐정의 승리와 사악한 적의 패배라는, 전통적인 추리소설의 이항대립을 벗어남으로써, 『장미의 이름』은 근대성의 핵심인 주체중심적 이성을 비판하는 반성적 담론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서영채는 이 작품에서 앎의 가능성이나 한계, 동일한 사안에 관한 상이한 관점을 통해 의식의 가변성을 읽어낸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장미의 이름』은 인식상의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킨다는 뜻이다.

 수수께끼와 그 해결, 문제와 해답의 해석학적 약호가 지배적이라는 점에서, 추리소설은 인식론적인 갈래라고 할 수 있다. 감추어진 정보나 잃어버린 앎의 단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탐정소설의 주인공 혹은 탐정은 인식의 주인공 혹은 김열규 교수의 표현으로 정보 주인공이라 부를 수 있다. 독자 또한 주인공과 유사한 방식의 추론 과정을 거쳐 부재하는 정보의 틈을 복구하고 그 해답을 재구성해야 한다. 『영원한 제국』이 추리소설의 모티프를 원용하고 있으므

1) 서영채, "이성중심주의와 장미", 『소설의 운명』(문학동네, 1995) 참조.

로 일단, 이 소설이 인식 혹은 앎의 문제와 연관됨을 알겠다. 형태상 개방액자를 취한 이 소설에서 도입부의 외부액자에서 나는 동경의 동양문고에서 우연히 정조시대 규장각 대교였던 이인몽이라는 사람이 쓴 『취성록』을 입수하게 된다. 이 책은 정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엄청난 사실들, 검서관 장종오와 정조가 외부의 음모집단에 의해 부자연하게 죽었으리라는 엄청난 암시를 하고 있다. 그 기록의 내용을 따르면, 정조의 명을 받아 일하던 검서관 장종오가 의문의 시체로 발견된다. 장종오는 정조의 명으로 선대왕마마 곧 영조의 어필인 『시경천견록』이라는 서책을 근거로 『시경천견록고』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 그가 변사체로 발견되고 서책도 사라지고 만다. 장종오의 사인은 유황을 바른 석탄의 독연에 의한 독살임이 밝혀진다.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이 사건은 노론 벽파가 영조의 금등지사를 입수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범한 것임이 드러나고, 금등지사를 정조에게 전하려던 이인몽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가 보낸 자객에게 공격을 받고 절벽에서 떨어진다. 살인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이 사건 이후 유신을 꾀하던 정조는 돌연히 승하하였고, 추적을 피해 30여 년을 방랑하던 이인몽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이 사건의 전말을 기록하여 남긴 글이 바로 『취성록』이다.

 전통적인 추리소설에서 주인공(탐정)은 과학적 사고를 지향하고, 이성의 힘에 대해 분명한 믿음을 견지한다. 그래서 추리소설은 탐정의 합리적 사고와 범죄자의 불합리한 욕망을 선명하게 대비하고 합리성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추리소설은 계몽주의의 전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영원한 제국』은 합리적인 이성의 궁극적인 승리와 불법적인 욕망의 최종 패배를 보여주지 않는다. 여러 면에서 이 소설은 오히려 반추리소설에 가깝다. 대체로 정보의 단서를 찾아 수수께끼를 풀어야 할 사람은 탐정 자신이기 때문에, 추리소설에서 사건은 대체로 탐정의 시점에서 경험된다. 또 추리소설의 주인공은 직업적인 전문가로 경험에 기초하여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문제의 해결에 성공함으로써 다른 인물들과 구분된다. 그런데 『영원한 제국』에서 사건들이 이인몽의 시점에서 경험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탐정에 버금가는 능력과 경험의 소유자가 아니다. 젊은 이인몽은 살인사건을 해명하는 데 있어 전문가도 아니며, 장종오의 죽음이 독연에 의한 살인임을 밝힌 것은 경험이 풍부한 정약용이다. 다른 한편, 추리소설에서 주인공이 해결하고자 하는 사건은 대개 기존의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사악한 범죄지만, 『영원한 제국』의 경우 범죄의 특질, 말하자면 일어난 일에 대한 윤리적 평가가 엄정하게 이루어진다고 보기 어렵다. 또 범죄자에 대한 심판이 없다는 점, 탐정이라 할 이인몽의 사적 삶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 등을 보면, 『영원한 제국』은 의심할 바 없는 악(비합리성)에 대해 과학적 이성과 합리적 논리의 승리를 구현하는 추리소설의 기본에서 벗어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반추리적 추리기법을 과학적 사고, 계몽적 이성에 대한 불신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계는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우연의 집적이며 따라서 이성의 힘도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반영되었다고 하겠다. 우연한 세계, 불연속적인 사실로부터 인과관계를 추론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삶이나 역사에도 그런 질서와 방향이 있다고 여기는 목적론적 사유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가능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이인화는 사건의 처음이 있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결말을 지향한다는 추리소설의 규칙을 반전시킨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원한 제국』은 계몽적 이성의 오만함을 반성하고, 선과 악의 진부한 이원대립에 대한 평속한 인식을 넘어선 것처럼 보인다. 인습적 사고를 뛰어넘으려는 중요한 시도로 당시의 노론과 남인의 대결을 그들 각자 상이한 철학적 기반 위의 정치투쟁으로 설명한다. 퇴계학파와 닿아 있는 남인은 왕권을 강조하여 육경 중심의 유교근본주의 위에서 성왕정치를 주장하고, 율곡과 닿아 있는 노론은 신권을 강조하여 사서 중심의 주자주의 위에서 붕당정치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흔히 심환지를 악당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그는 이념적 정통을 고수하려는 원칙주의자라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할 때, 『영원한 제국』은 동일 사안에 대한 상반된 관점을 통해 인식의 제약이나 한계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동일 문제에 대한 가능한 입장을 모두 보임으로써 인식의 한계에 대한 우리의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인의 편향된 관점을 지닌 이인몽의 맹목적 근왕주의를 지적하면서도, 도입액자의 화자는 정조가 죽은 이후 식민지로 전락한 역사적 사실을 들어 성왕정치를 옹호한다. 우리는 그、‘진보적’이라는 입헌정치를 못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홍재유신, 즉 정조의 절대왕정을 수립하지 못해서 망한 것이다.

 따라서 『장미의 이름』에서 윌리엄과 요르게와 달리, 아드소가 드러내는 제3의 시각이 없고, 결과적으로 『영원한 제국』은 정치적 카리스마를 향한 이인몽의 불합리한 염원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흥미로운 것은 정조의 행위에 관한 부분이다. 장종오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번 사건의 근원은 사도세자의 죽음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 영조는 노론 일파의 음모를 눈치챘다는 것, 아들을 잃은 그 비통한 심정을 시와 기록으로 남겨 채제공에게 맡겼다는 것, 그것이 바로 심환지 일파가 탐문하는 선대왕마마의 금등지사라는 것이다. 이 금등지사는 정조가 아비의 원한을 풀고 노론을 제거할 수 있는 “확실한 물증”이다. 그런데 이 금등지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것에 관한 영종기사의 기록은 장종오가 모필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조는 적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물증을 조작하고 정보를 감추며, 수수께끼를 만드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거짓 정보를 흘려둠으로써 그 물증을 없애려는 노론의 어떤 도발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전통적인 추리 범죄소설에서 범죄자가 수수께끼를 만들고 탐정이 그것을 푼다는 공식이 뒤집어진다. 오히려 정조가 수수께끼를 만들고 정보를 감춘다면, 노론 일파는 그것을 풀고 찾는 세력이다. 이인몽이 정조의 행위에 대해 노론 일파와 다름없다는 환멸을 느끼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영원한 제국』은 범죄의 윤리적 성격을 논함에 있어 유연한 입장을 보인 것이다. 그런 논의와 평가는 정조의 행위와 연관되어 성왕정치, 근왕주의라는 또다른 이데올로기를 섬기는 데 근본적인 회의를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구효서의 『비밀의 문』도 동일한 사건에 대한 상반된 관점이라는 인식론상의 불확실성을 강조한다. 이 소설은 여러 개의 텍스트가 겹쳐 놓인 중층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첫째, 재상 시수팔라가 기록한 아소카와의 전기인 "아육왕상전"이 그것. 둘째, "언어는 화석을 남기지 않는다"는 제목으로 전달된 최윤석의 글. 셋째, 친구 최윤석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겪는 사실을 소설적으로 구성한 류인범의 글. 넷째, 류인범이 맡기고 간 원고를 편집 재정리한 작가의 “끼여들기”. 마치 양파 껍질의 구조와 같은 이런 소설은 독자에게 불연속적 반성적인 독서를 요청하게 된다.

 이런 인식상의 불확실성을 강화하는 것은 특히 시수팔라의 기록이다. 그의 기록은 전륜성왕이라는 아육왕에 대한 기존의 평가와 정반대로, 그가 패륜적·야수적인 폭군임을 폭로하고 있다. “말씀의 불가사의한 힘”을 믿었고, “거대서사의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확인했던 최윤석에게 시수팔라의 기록은 언어, 이성, 진리에 관한 근본적인 회의, 인식론상의 불확실성을 경험하게 만든다.

 나는 한 역사에 대해 전혀 다른 두 개의 결과물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우두망찰. 그것들은 모두 촘촘한 문자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늘 이성적 사고와 과학적 논리로 사실과의 근접성을 드러내려 하지만 문자는 끝내 사실과 진실을 담지해내지 못한다. 그것은 이용되는 도구일 뿐이다. 얼마든 사악하게 사용될 수 있다.

 동일한 사건에 대한 상반된 관점과 내용을 대면한 최윤석은 극도의 딜레마에 빠진다. 즉 어느 기록이 사실이고 거짓인지, 그런 구별을 어떻게 해낼 수 있는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최윤석의 인식론적인 회의를 요약하면, 첫째, 역사적 진실에 대한 회의. 궁극적으로 역사는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한 지배자의 기록이며, 그들에 의해 왜곡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이런 역사 왜곡을 지원하는 것이 지식, 이성 혹은 언어이다. 언어는 권력과 결탁한 억압과 지배의 도구이며, 권력의 태반이 되는 조작과 이기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셋째, 신성한 말씀이나 사회혁명의 거대서사 또한 언어적 관념체계로 개인의 진실을 억압하는 집단적 이념으로 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최윤석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언어의 타락이다. 언어는 자기 밖의 불순한 것, 예를 들면 종교·권력·역사·정치 등과 근친관계를 맺음으로써 진리를 위협하는 악마적 도구로 전락한다. 이런 점에서, 『비밀의 문』은 진리의 외피를 쓴 종교나 정치·이성을 가장한 비이성을 폭로하면서 기존의 지식체계를 근원적으로 의심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 소설은 언어 혹은 이성적 인식의 한계를 드러내어 독자에게 인식론적 반성을 촉구한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종교의 본질은 무엇이며 우리는 과연 왜곡되지 않은 역사를 알 수 있는지, 이성의 확실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정당한 것인지, 언어를 통해 습득된 우리의 지식은 믿을 만한 것인가를 질문하게 만드는 것이다.

 앎 혹은 지식의 불확실성에 혼란을 겪던 최윤석은 “진과 위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그 어느 쪽도 진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즉 모든 기록은 탐욕과 원한에서 비롯된 추악한 허울이라는 것이다. 이에 그는 모든 기록을 불신하면서 언어와 언어의 순수성에 대한 이전의 믿음을 버리고 지하집단으로 들어간다. 지하집단은 묵음, 환각물질을 통한 통음난교를 통해 “이성의 작용을 제로”로 만들고, 지상의 세계가 요구하는 가치덕목과 사고체계를 일거에 파괴함으로써 인간과 세계를 혁신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의 집단 속에서도 최윤석은 그들 지도부가 말과 글을 사용한다는 것, 천지인의 수직적인 구원체계를 지니고 있어 세속종교와 동일한 신학적 형이상학을 차용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정치와 종교의 역사는 “하늘과 인간과 땅의 수직적 역사”에 다름없으며, 지하집단 또한 그들처럼 하늘과 인간을 동일시하는 “유비적 추리의 비합리적 전통”을 추수하고 있고, 이는 결국 지배와 피지배의 역사를 되풀이하리라는 것이다. 특히 환각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집단의식에 대해 최윤석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비판한다. 그들은 일단 침묵을 실천함으로써 악마의 도구인 언어를 파기하고, 그 동안 언어체계에 의해 제공되었던 사고구조며 세계관의 허상을 모조리 깨부수는 수행을 통해 저 깊이 가려져 있던 본연의 진리와 만난다는 식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주장을 전파하거나 신봉할 때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폐단을 훨씬 능가하는 위험천만한 수단을 도입하고 있었다. 내겐 그렇게 보였다. 거듭 말하지만 그것은 특정한 의미와 개념을 벗어나 사고하지 못하게 하는 교조, 전제, 광신의 형식이었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비판의 기능마저 무참히 빼앗는 짓이니 최악의 방식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환각물질을 통한 체험은 “기생충을 죽이자고 양잿물을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표현을 달리하면, 언어나 이성의 폐해가 있다고 그것을 전면 폐기하는 것은 마치 심장이 아프다고 심장을 덜어내는 우행과 같다는 것이다. 언어의 비판적 기능을 고려할 때의 최윤석은 자신들의 믿음에 광적으로 몰입하는 지하집단에 대해 이성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는 『장미의 이름』에서 윌리엄이 제자 아드소에게 경고한 것, 즉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조심하라는 이성적 경고와 흡사하다. 그 경고는 자기 나름의 진리(신앙)에 대한 집착이 인간을 억압하고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직 이탈자를 처단하는 이들 지하집단과 최윤석의 관계는 맹목적인 신앙과 반성적 이성의 대립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밀의 문』에서 최윤석이 아드소와 같은 제3의 입장을 취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는 지상에서 지하세계로 이동하고, 지하에서 지상세계로 귀환한다. 그는 언어와 이성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하여, 그것에 대한 회의와 불신, 이에 따른 묵언과 광란의 세계를 거쳐 다시 언어를 되찾는 과정을 보인다. 그는 지하세계에서 글과 자신을 버리는 일종의 죽음을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 지상세계에서 글을 되찾고 자기를 재건하는 것이다. 작가 구효서는 『비밀의 문』이 이런 최윤석과 그의 행적을 탐문하는 류인범의 성장에 관한 기록이라고 부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두 인물이 성장한다면, 그 성장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따져봄직하다.

 우선 지상으로 복귀하여 “눈부신 화이트 셔츠를 입고, 지상의 단단한 플랫폼을 밟으며 살아가”는 최윤석에게 성장 자체가 갖는 아이러니컬한 결과를 찾아볼 수 없다. 이미 루카치가 지적한 것처럼, 자신의 본질을 찾아 편력하는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이 원한 바를 얻지 못하거나 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얻는다. 루카치는 이런 아이러니를 길이 시작되자 여행이 끝난다는 명제로 표현한 바 있다. 생의 이런 아이러니를 눈치채지 못하는 한, 최윤석과 류인범의 성장은 오이디푸스의 형상과 다를 바 없다. 눈물을 참는 최윤석이나 해주와의 결별을 다짐하는 류인범은 감상을 극복하고 근친상간을 피하려는 오이디푸스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강건한 이성적 남자로서 기존의 문화적 질서 속에 편입되는 것이다. 환각물질인 소마가 “본능의 영역”이며, 류인범에게 지하의 낯선 세계가 “나의 내면, 혹은 무의식, 존재의 이면”으로 여겨지듯이, 환각과 통음난교의 지하세계는 이들 자신의 비이성, 낯선 타자일 것이다. 지상으로 복귀한 것은 이런 자기 내면의 비이성적 타자를 억압하고 희생함으로써 주체를 정립하는 것이며, 따라서 최윤석의 소설은 이성적 주체라는 근대성의 핵심을 그대로 간직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담론에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선명한 차별과 우열까지 함축된다. 최윤석과 류인범이 소설을 쓴다면, 해주는 편지를 쓴다. 사문서에 속하는 편지가 개인의 내밀한 속살과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소설 혹은 책은 공적 일반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소설쓰기는 출판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출판은 글쓰기를 공적으로 일반화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성 인물의 글쓰기가 이성과 의식의 산물이라면, 여성인 해주의 글쓰기는 감정과 육체의 표현처럼 보이며, 이런 차별에 사적인 감정과 육체에 대한 공적인 이성과 의식의 우위가 놓인다. 결국 『비밀의 문』은 앎의 불확실성을 통해 지식과 이해와 관련된 개념적 고정성에 도전하면서도, 이성에게 낯설고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인식론적 측면에서 지상세계의 보편적 공준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두 젊은이가 통과한 지하집단은 이런 보편적 공준이라는 한계를 넘어가는 금단의 영역이며, 『비밀의 문』은 이런 금기를 범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것이 아닌가.

 

3. 세계의 존재론적 다원성

『장미의 이름』 도입부를 보면, 이 소설의 기초는 14세기의 필사본 『멜코의 수도사 아드소의 수서본』이라는 것, 그런데 번역중인 그 서책이 사라짐으로써 화자는 그것이 “위조된 유령도서” “있지도 않는 책의 허깨비”가 아니었던가라며 말머리를 연다.2) 이런 기법은 소설내 소설기법처럼, 현실세계와 허구세계, 사실과 환상 등 상이한 두 세계나 이질적인 존재질서를 접합시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장치는 여기의 현실이 가능 유일한 현실이 아니며, 이 세계에는 상이한 질서와 규칙을 지닌 다른 세계, 다른 현실들이 공존함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이 세계의 유일성이나 불변성을 훼손하고 세계의 존재론적 가변성과 불확실성, 다원성을 환기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맥홀과 하비는 존재론적 요소가 전경화된 것으로 지적한 바 있다.3) 구효서와 이인화의 두 소설 역시 세계의 다원성 혹은 존재질서의 다차원성을 드러낸다. 양파 껍질의 구조로 구효서의 소설은 여러 관점에 의해 매개되고, 류인범이 추적하는 최윤석이 사실은 지금까지 읽어온 동명의 소설의 작가임이 드러남으로써 류인범은 작가(최윤석)를 찾는 작중인물이 된다. 이인화의 경우에는 식민지 지배나 박정희 정권 등 현실세계의 역사적 사실을 도입하여

2)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이윤기 역, 열린책들, 1989, 4쇄), "움베르토 에코의 서문" 참조.

3) 이들은 모더니즘 소설에서 의식의 가변성, 앎의 한계 등으로 인식론적 요소가 지배적인 것과 달리, 포스트모던 소설에서는 세계의 다양성과 불확실성을 통해 존재론적 문제가 전경화된다고 파악한다. 필자는 특히 맥홀의 견해에 크게 힘입었다. D. Harvey, The Condition of Postmodernity(Basil Blackwell, 1990), B. McHale, Postmodernist Fiction(Routledge, 1989), Constructing Postmodernism(Routledge, 1992) 참조.

 허구의 세계와 존재론적으로 대면시킨다. 그 밖에 소설의 제작 과정을 드러내고, 작가가 허구의 세계에 끼여들기를 행하는 것도 소설세계의 독자적인 존재론적 지위를 위태롭게 만들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와 허구세계라는 두 세계의 상호침투를 보임으로써 지금 여기의 가시적인 삼차원적 현실을 유일한 것으로 볼 수 없게 만든다. 이는 박일문, 장정일, 윤대녕, 송대방 등 90년대의 젊은 작가에게서 광범위하게 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