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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일鄭씨'문계공파

*[문계]'선조유적지 순례'(3)- '지백호之묘'

by fireball'Flee 2025. 10. 28.

'선영묘제 및 선조유적지 순례' / 2025.10.26

Schedule :  2025.선영 묘제 → 백운재(지백호之묘) → 육부전 → 남성재 → 송도(뒷풀이)

 

 

 

 

              *백운재@지백호之묘*               

 

 

“경주 남산 백운대 산기슭에 옛 진한의, 

6부 취산 진지촌장 지백호의 무덤이 있었다. 

몇 천 년의 세월을 삭혀온 그의 뼈와 살점이

공기 좋은 남산 골짜기 샘물에 녹아서

어느 봄 산천에 진달래꽃으로 피고 있다.

 

이렇게 지나온 수 천 년 동안 그는,

그의 무덤을 산계곡에 숨기면서 죽어서 살고 있었다.

죽어서 몰래 살아온 지백호가

어느날 무지개를 타고 하늘에 오르다가

사람들의 눈에 뜨이어 / 그의 무덤이 되었다.

 

온 세상에 알려져 이렇게 무덤이 되어버린

취산 진지촌 지백호가 그 속에 살고 있었다.”

 

----------------------------------------------------------------------------------------------정민호 -----------

 

 

시조 지백호(智伯虎)는,

고조선 멸망후 진한으로 남하한 사로국 6부중 취산 진지촌장이며,

알평, 소벌도리 등 6촌장과 함께 알천에서 박혁거세를(나정) 군주로 추대한, 개국원훈이라.

() 낙랑후 지백호 (유리이사금.32년), 시호는 문화(법흥왕.516)이며,

무열왕.658년에(?) 감문왕(甘文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

 

 

"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진촌(干珍村),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 으로, 이들이 바로 진한(辰韓)의 6부이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권. 시조 혁거세 거서간]  -------------------------------

 

 

9년(32) 봄에 6부(六部)의 이름을 바꾸고, 성씨(姓氏)를 사여하였다.
양산부(楊山部)는 양부(梁部)라고 하고 성(姓)은 이(李)로 하였으며,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라고 하고 성은 최(崔)로 하였다.대수부(大樹部)는 점량부(漸梁部).라고 하고 성은 손(孫)으로 하였으며, 간진부(干珍部)는 본피부(本彼部)라고 하고 성은 정(鄭)으로 하였다.가리부(加利部)는 한기부(漢祇部)라고 하고 성은 배(裵)로 하였으며, 명활부(明活部)는 습비부(習比部)라고 하고 성을 설(薛)로 하였다. 

----------------------  [신라본기 제1권 유리이사금]  ---------------------

 

 

"曰, 형기풍수에 의하면 떡을 찌는 시루형으로,

천자만손에 부귀영화가 누대로 이어진다는 명당 중의 명당이며,

현재 진한 6촌장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능묘임  

 

 

열위묘소 -------(18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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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림군(年) 사단

 

정년(鄭年)은, 

신라 말 청해진을 근거로 동아시아의 해상무역권을 독점했던 장보고의 핵심 참모이다.

젊어서 단짝 친구 장보고와 함께 당나라에 건너가 무관으로 입신했으며 ....................

 

 

문정공 '진후'(중시조) 영정

 

 문정공(文正公) 정진후(鄭珍厚)는

고려 때 문과에 합격,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군기시윤(軍器寺尹)과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 [蛇足] :

1)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에 ‘본피부(本彼部)’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하는   데, 후대의 본피부가 경주 시내를 기준으로 동남쪽 낭산(狼山) 방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 부근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취산 진지촌에 협주를 붙여 ‘진지’의 이칭으로 ‘빈지(賓之)’와 ‘빈자(賓子)’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빈자촌의 경우 『동경잡기』 권2 각방조에 괘릉(掛陵)으로부터 용가산(龍加山)에 이르는 곳에 빈자방(賓子坊)이 있다고 나와서 참고가 된다. 이를 근거로 진지촌의 위치를 경주에서 울산 방면으로 나가는 길목의 괘릉 남쪽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1975,'三國遺事考證]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2) '삼국유사' 曰, "기원전 117년 화산에 강림하여 사로국 6촌중 자산 진지촌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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