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12.
[A]


[B]
Edvard Grieg



산자연중학교 달집태우기 = '율법의 완성'


*[공지사항]
*영명축일' Palanka 만들기*
----------------------------- Fr.손성호(요셉), Fr.이영동(치릴로) -----------------------------
*Palanca*
"祝. 영명" 손성호(요셉) 신부님 "祝. 영명" : 손성호(요셉) 신부님 "祝. 영명" : 손성호(요셉) 신부님 "祝. 영명" : 손성호
◎ Via Dolorosa
◎ 주님의 길을 따름에 결코 흐트러짐이 없도록 부단히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영명축일 영적선물* | ||
내 용 | 손성호(요셉) 신부님 |
이영동(치릴로) 신부님 |
주모경 | ||
묵주기도 | ||
미 사 | ||
희생극기 | ||
성체조배 | ||
십자가의 길 | ||
사제를 위한 기도 |
||
화살기도 | ||
2017.3.15(수)까지 제출 바랍니다. |
◎ 기도쪽지는 주보대 위에 비치해 두었습니다.
◎ 영육간 건강도 함께 기도해 주시고, 2017.3.15(수)까지 기일 엄수 제출 바랍니다,
"祝. 영명" 이영동(치릴로) 신부님 "祝. 영명" 이영동(치릴로) 신부님 "祝. 영명" 이영동(치릴로) 신부님 "祝. 영명"
- Story Tell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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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Cyrillus) / 3월 18일 *

315년경 예루살렘에서 로마 제국 황제 가문의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듯한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는 예루살렘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으며, 342년 또는 그 후에 성 막시무스 2세(Maximus, 5월 5일)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성 키릴루스는 수년 동안 예비신자 교육에 전념하다가 350년 또는 351년에 예루살렘의 주교인 성 막시무스 2세가 사망하자 그를 승계하여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대한 교계적인 관할권을 주장하던 카이사레아(Caesarea)의 아리우스파(Arianism) 주교이던 아카키우스(Accacius)와 아리우스주의자들에 의하여 그는 자신의 주교좌에서 해임되고 유배를 당하였다. 또 다른 이유는 성 키릴루스가 아리우스파에 반대하는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재산을 매각하여 기근의 희생자들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교회 재산을 불법으로 매각했다는 누명을 쓴 성 키릴루스는 타르수스(Tarsus)로 갔으나 359년 셀레우키아(Seleukeia) 주교회의에 의해 복직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재차 아카키우스의 음모에 의하여 황제 콘스탄티우스로부터 축출되었다가,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다시 복직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성 키릴루스는 367년에 세 번째로 유배되었으나, 발렌스 황제가 율리아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에 유배된 모든 종교인들을 사면함으로써 석방되어 다시 주교좌로 돌아왔다.
또 다음 해에는 안티오키아(Antiochia) 공의회가 니사(Nyssa)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3월 9일)를 팔레스티나(Palestina)로 파견하여 그가 역설하던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로 인한 잡음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이 용어는 니케아(Nicaea) 신경의 기본 용어이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예루살렘 주교좌는 파벌주의와 아리우스주의로 뒤엉켜 있고 또 윤리적으로 타락해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성 키릴루스의 신앙과 그 주교좌는 올바르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 후 성 키릴루스와 성 그레고리우스는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공의회에 참석하였고, 여기서 성 키릴루스는 니케아 공의회의 정통 교리를 따르는 주교로 인정받았다.

사실 성 키릴루스는 성서학자이자 뛰어난 설교가였다. 그의 작품 중에서 24편의 강론으로 구성된 “예비자 교리”(Catecheses)가 가장 유명한데, 이는 콘스탄틴 대제가 336년 예루살렘에 완공한 성묘 성당(Church of the Holy Sepulcher)에서 348년 사순과 부활시기에 한 강론으로 예비신자와 새 영세자들의 신앙과 생활을 위한 명쾌한 지침서이자 교리 해설서이다. 또한 전례적으로도 4세기의 팔레스티나 전례를 자세히 보여주는 소중한 문헌이다. 역사가인 소크라테스와 소조멘은 성 키릴루스는 철저한 아리우스주의 반대자였고, 그의 정통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기술하였다. 387년 3월 18일에 세상을 떠난 그는 교황 비오 10세(Pius X, 1903-1914년 재위)에 의해(또는 1882/3년에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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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요셉(Josephus) / 3월 19일 --

예수님의 양아버지 성 요셉(Josephus)에 관한 내용은
마태오 복음 1-2장, 루가 복음 1-2장의 예수 탄생 기사에서 발견되는 것이 성서상의 근거이다.
이에 따르면 요셉은 다윗(David) 왕가의 후손이고, 요셉 가문은 유대아의 베들레헴에서 왔으나
갈릴래아의 나자렛으로 이사하여 목수 일을 하고 있었고,
이미 의인으로 존경받고 있었다.
그는 마리아와 약혼하였으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가진 마리아와 파혼하지 말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천사가 명한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는 마리아와 함께 아기 예수께 조배하러 온 동방박사의 방문을 받았고,
헤로데의 영아 학살을 피하기 위하여 가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피신하였다.
헤로데가 죽은 후에야 가족들은 나자렛으로 돌아와서 살았다.
그와 마리아는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었고, 주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하였다.
예수가 12세였을 때 그는 마리아와 예수와 함께 명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을 다녀오다가
예수를 잃어버린 것을 알고 다시 돌아가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학자들과 이야기하는 아들을 찾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성 요셉은 루가 복음 4장 22절을 제외하고는 신약성서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성 요셉은 아마도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이전에 운명한 듯 여겨진다.
외경인 “야고보의 원복음서”에는 그가 마리아와 결혼하였을 때 이미 노인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성 요셉에 대한 공경은 동방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요셉 이야기"라는 외경은 4세기부터 7세기까지 대중들로부터 사랑받는 인기 있는 책이었다.
서방 교회에서는
아일랜드 사람인 웬거스 펠리르란 분이 9세기에 성 요셉 축일을 '기념'했다는 언급이 있으나
15세기까지는 요셉 공경이 확산되지 않다가,
1479년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가 로마(Roma)에 요셉 신심을 도입한 이후 널리 전파되었다.
성 요셉 신심은
특히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Teresia, 10월 15일)와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 de Sales, 1월 24일)에 의하여 보편화되었고,
1870년에 교황 비오 9세(Pius IX)가 요셉을 ‘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으며,
교황 레오 13세(Leo XIII)는 요셉을 가장의 모범으로 선포하면서
성인들 가운데서 성모님 다음의 위치로 올리셨다.
‘노동자의 수호자’란 칭호는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가 부여하였고,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사회정의의 수호자’로,
또 비오 12세는 1955년 공산주의자들의 노동절에 대응해서
5월 1일을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로 제정 선포하였다.
성 요셉은 한국 교회의 수호성인이다.
*공지사항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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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영명(Fr.치릴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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