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동정녀 마리아에 관한 논쟁들*

1. 기본내용
교회는 마리아가 평생토록 동정(童貞)이었음을 선포한다.
즉, 예수 탄생 이전이나 이후나 마리아가 남편 요셉과 성적 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가 평생 동정이었다는 것은 마리아가 신체적인 완전함을 보존하였다는 의미이고, 다른 말로는 종교와 신앙의 차원에서 마리아가 하느님께 온전히 속해 있다는 의미이다.
마리아의 이러한 (평생을 동정으로 살아야하는) 봉헌은 하느님의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 의지와
동의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교회는 또한 가르치고 있다.
2. 가르침의 근거
마리아의 동정성은 두부분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하나는 예수 탄생 이전의 동정성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탄생 이후의 동정성이다.
하나는 예수 탄생 이전의 동정성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탄생 이후의 동정성이다.
전자는 성서를 통해, 후자는 교부들의 증언과 교회 전승을 통해 알 수 있다.

2.1 성서적 근거
성서에서는 예수 탄생 이전의 동정성에 대해서만 계시해 주고 있다.
이사야 7,14 :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 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일반적으로 이 구절이 동정 탄생의 예언으로 간주된다. 내용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지지하는 만큼 이 구절에 나타나는 여인 역시 마리아를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마태오 복음사가에서부터(마태 1,23)제 2차 바티칸 공의회(교회헌장, 55항)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전통적인 견해이다.
루가 1,26-35 :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로 보내시어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 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 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인사하였다.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여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러자 천사는 다시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일러 주었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가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천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
라.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들 하였지만,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 지가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 갔다.
예수 탄생은 마리아가 요셉과 결혼하기 전 약혼 시절에 이루어진 것이며, 분명히 그때 마리아는 처녀로서 성령으로 말미암은 기적적 사건이다.
마태오 1,18-25 :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은 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도 없었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요셉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이어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하고 일러 주었다.
이 모든 일로써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함께 계시다" 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 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고 지내다가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그 아기를 예수라고 불렀다.
이 구절은 이사야 7,14절을 상기시키며, 예수의 탄생이 요셉과 성적 관계없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예언적 사건임을 밝히고 있다.

2.2 교부들의 근거
교부들은 마리아의 동정을 예수 출산 이전, 출산 중, 예수 출산 이후의 동정으로 구분하여 논하고 있다.
a. 출산 이전의 동정성
이에 관해서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유스티노, 이레네오 교부들에게서 이미 발견되고 있다.
이냐시오에게 마리아의 동정성은 하느님이 이루신 세 가지 신부 중의 하나이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못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 신성의 보증이 되고 있다.
유스티노는 창세기 3,15과 이사야 7,14를 인용하면서 마리아의 동정성이 이냐시오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메시아성을 증명하는 한 가지 징표로 이해하고 있다.
이레네오는 마리아의 동정성을 교회 신앙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마리아의 동정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되어 있다.
예수의 탄생이 동정 탄생이라는 사실은 예수를 한낱 인간으로 보려는 이단자들 외에는 아무런 문
제없이 받아들여졌으며 교회의 정통 신앙의 한 가지 조항이 되고 있다.
최근 신학은 새로운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과연 마리아의 동정 잉태가 역사적 전승에 의존하고 있는 것인지, 또는 마리아나 요셉의 기억에 의존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사야 예언을 근거로 복음사가들이 묵상한 결론으로서의 증언인지 묻고 있다.
이런 질문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은 역사적 전승으로 보고 있다.
마리아의 동정 잉태를 증언하는 마태오와 루가의 '예수의 어린시절에 관한 사화'들은 서로 다른 전승에서 유래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다른 전승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다.
(마태오는 요셉의 의심, 동방박사의 방문, 큰 별의 출현, 에집트로의 피난이 나타나는데 루가에게는 그러한 정보가 빠져 있다. 한편 루가에게는 천사의 예수 탄생 예고, 엘리사벳의 방문, 목자들의 아기 예수 방문, 아기 예수의 봉헌 등이 독자적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두 가지 전승으로부터 각 유래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이루고 있는 그 하나가 바로 마리아의 동정잉태이다.
그런 점에서 마리아의 출산 이전의 동정성은 역사적 전승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b. 출산 중의 동정성
이에 대해 성서에서는 아무런 해답도 찾을 수 없다.
다만 외경인 [야고보 복음]에 마리아가 예수를 출산하는 순간에도 동정이 보증되었다는 것을 살로메라는 산파를 통하여 입증하고 있다.
교부 테르툴리아노는 이에 대해 불투명한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동시대의 오리게네스뿐 아니라 이후의 알렉산드리아의 디디모, 대 바실리오, 니싸의 그레고리오, 이코니아의 안필로키오, 암브로시오등은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한편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잠겨진 문을 통과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듯이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의 동정성에 아무런 해도 주지 않고 잉태되고 출산되셨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이는 신앙에 속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테르툴리아노 이후 마리아의 출산 중의 동정을 포함한 마리아의 평생동정성은 모든 교부들에게 문제없이 수용되었다. 393년 로마 시노드와 406년의밀라노 시노드는 마리아의 '출산 중 동정'을 거부하는 입장을 단죄하였다. 교황 비오 12세는 '마리아 승천 교의'를 선포하면서 아울러 출산 중의 동정을 언급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문헌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성모와 성자의 이 결합은 그리스도를 잉태하실 때부터 그리스도 죽으러 오실 때까지 나타난다. 어머니의 완전한 동정성을 감소시키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성화하신 당신 맏아들을 목동들과 박사들에게 보여주시던 성탄 때에 그 결합이 나타났다(57항)"
c. 출산 이후의 동정성
이 부분은 논쟁이 가장 심했고,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신약성서에는 '출산 이후의 동정성'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하지만 성서로부터 본질적인 암시를 얻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교회의 옛 전통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가 성화되었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미 클레멘스는 외경 [야고보 복음]을 인용하면서 평생 동정을 주장하였고, 오리게네스는 하느님의 모친에게 걸맞은 모습으로서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옹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의 첫 번째 동정이라면, 마리아는 모든 여성의 첫 번째 동정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아타나시오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왜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을 맡겼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마리아에게는 예수 외에 다른 자녀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옹호하였다.
에프렘은 마리아의 동정이 인간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이지만 전능하신 하느님에게는 쉬운 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후 예루살렘의 치릴로, 디디모,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오도 앞선 교부들의 이론을 따르고 있다.
바실리오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위해서 마리아의 평생 동정은 적합한 것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신자들은 마리아께서 한 순간이나마 동정이기를 멈추었다고 느끼지 않는 '신자들의 신앙감(Sensus fidelium)'이 그것을 증명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니싸의 그레고리오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은 하나의기적이며, 모세가 체험한 불에 타고 있으면서도 타없어지지 않는 가시덤불에 비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마리아는 천사가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는 순간 동정을 허원하였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아우구스티노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무엇보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탄생 이전에 정화 또는 성화되었으며, 동정으로 사는 수도자들의 모범이 되신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서방에서는 암브로시오가 이러한 모범으로서의 마리아의 동정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예로니모는 당시 이단들과 이방인들이 제기하는 마리아의 동정성 문제에 성서적으로 하나하나 반론을 제기하였다(아래 참조).
아우구스티노, 베드로 크리솔로고 등의 교부들에게서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이 삼중형식으로 고백되고 있다. "동정으로 잉태하셨으며, 동정으로 출산하셨고, 출산 후에도 동정으로 머무신다." 이러한 교부들의 이론을 그 후 모든 교부들과 교회가 아무런 문제 제기 없이 수용하엿다.
마침내 교회 교도권은 553년 제 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선언하였다.
649년 라테란 공의회는 이 입장을 재천명하고 있다.
그 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신앙의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3. 예로니모와 엘비디오의 논쟁

교회의 가르침과 달리 엘비디오가 성서를 인용하여 마리아의 출산 이후의 동정을 거부하자,
당시의 성서학 대가인 예로니모(†419)는 역시 성서를 통해 하나하나 반론을 제기하였다.
3.1 마르코 3,31-35 : 예수의 형제들에 관한 문제
그 때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를 불러 달라고 사람을 들여 보냈다.
둘러 앉았던 군중이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밖에서 찾으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고 둘러 앉은 사람들을 돌아 보시며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엘비디오는 성서에 분명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들 야고보와, 시몬, 요셉은 마리아가 요셉과의 결혼 생활에서 얻은 자녀들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서학의 대가였던 예로니모는 성서가 쓰여질 당시에는 '형제(adelphos)'라는 단어가 매우 광의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사촌과 이종형제를 모두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들이 반드시 마리아의 자녀들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고 논박했다.
3.2 루가 2,5-7 : 첫아들에 관한 문제
요셉은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갔는데 그 때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가 머물러 있는 동안 마리아는 달이 차서 드디어 첫 아들을 낳았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
엘비디오는 루가 복음에 나오는 '첫아들'이라는 표현은 예수를 낳은 다음에 둘째, 셋째 아들을 더 낳았음을 전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예로니모는 '첫아들'이란 표현 역시 둘째, 셋째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자궁을 처음 연 사실을 지적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첫아들'이란 표현은 외아들에게도 사용될 수 있는 표현이었다.
3.3 마태오 1,25 : 시기의 문제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 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고 지내다가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그 아기를 예수라고 불렀다. 엘비디오는 "아들을 낳을 때까지"라는 표현은 그 이후에는 정식으로 결혼 생활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수를 낳기 전에는 동정이었지만, 그 다음에는 부부생활을 통해 아들을 더 낳았으며, 마르코 3, 31-35에 나타난 형제들이 그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에대해 예로니모는 '때까지'라는 표현도 그 사건과 그 시점을 강조하는 것이지, 그 다음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내가 네 원수를 발판으로 삼기까지(시편 110,1)"라는 표현은 그 다음에 예수가 하느님의 오른편을 포기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예로니모는 이처럼 성서의 모든 구절들을 해설하였다.
4. 오늘날의 주된 논쟁
4. 오늘날의 주된 논쟁
4.1 자연과학적 논쟁 : 과연 고등동물에게 단성출산이 가능한가?
설명: 성서나 교부들도 마리아의 동정이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로 받아들였다. 즉 교회가 마리아의 동정성을 선포하는 기반은 자연적 기반이 아니라 초자연적 기반이다.
무엇보다 "하느님게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루가 1,37)"는 신앙이 그 기반이다.
즉 마리아의 동정성은 다른 신앙과 마찬가지로 신앙의 진술이지 과학적 진술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을 넘어서는 것이다. 과학은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전승은 마리아의 출산이 고통없는 출산이며, 마치 잠긴 문을 통과하듯(요한 20,26) 처녀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통과하는 출산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최근의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마리아의 동정성은 마치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감소시키지 않듯이, 마리아의 모성을 손상시키거나 감소시키지 않는다.
교회 전승은 마리아가 온전히 '어머니'이시며 동시에 온전한 '동정녀'이심을 고백하고 있다.
둘째, 출산 중 산고가 없음은 동정성의 본질도, 모성의 본질도 아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산고를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은 '육체의 영성화'를 의미하는 동정성에 관한 증언이 된다.
셋째, 동정성의 본질은 윤리적, 영적, 성서적 차원에 속한 것이며, 출산중 고통이 없다는 것은 마리아의 충만한 동정성, 즉 육신과 영혼의 동정성, 생리적, 신체적 차원의 동정을 포함하여 본질적인 영적, 윤리적 차원의 동정성까지도 성취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론에 대하여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도 거부도 하지 않고 있다.
[출처] ..................................................................................................................
'○ Catholic(2) > *AveMar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Q&A]'프로테스탄트와 이슬람은 성모 마리아를 어떻게 생각하나' (0) | 2022.09.04 |
---|---|
*성모 마리아 - 연표 (0) | 2022.09.04 |
*성모님 관련, 다양한 세례명들 (0) | 2022.09.04 |
*[Carmel] 성모님의 중요 메시지 (0) | 2022.09.04 |
*성모호칭 .... 기도 (0) | 2022.09.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