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鄭世雅 - '호수실기'
2009. 3. 25.
[출처] www.yuniljung.com
*鄭世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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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벼슬 : 조선 중기의 의병장.
▣연대 : 1535(중종 30)∼1612(광해군 4)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호수(湖○). 시호 강의(剛義).
영천(永川)에서 세거(世居)하였다.사성 종소(從韶)의 현손으로, 윤량(允良)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900여명의 의병을 모아 편대를 정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의병을 규합, 대장이 되어 영천(永川)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때 곽재우(郭再祐)는 의령에서, 권응수(權應銖)는 신령에서 각각 기병하여 서로 성원하였다. 그해 8월 권응수의 지휘 아래 영천 의병장 정대임(鄭大任), 정천뢰(鄭天賚), 조성(曺誠), 신해(申海) 등과 함께 영천 박연(朴淵)에서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거두고 영천성을 수복하였으나, 전공포상은 받지 못하였다. 영천성을 수복한 데 이어 다시 경주의 왜적을 격퇴하니, 이로 인하여 낙동강 왼쪽이 온전하였다.
이듬해 평양과 서울이 차례로 수복되자 군사를 조희익(曺希益)에게 맡기고 자양(紫陽)으로 돌아갔다.체찰사 이원익(李元翼)에 의하여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고, 나중에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을 잠시 지내고 곧 사직하였다.
장현광(張顯光) ·조호익(曺好益) ·이준(李埈)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천의 환고사(環皐祠)에 봉향되었으며, 그에 대한 [호수실기]가 있다.
墓所 : 永川市 紫陽面 聖谷洞 騎龍山
1535年(中宗 30年 乙未) : 永川郡 紫陽縣 魯巷村(영천시 자양면 노항동) 옛 댁에서 誕生.
1557年(明宗 12年 丁巳, 23歲) : 比安縣監 一直 孫致雲의 따님과 結婚.
1558年(明宗 戊午, 24歲) : 進士試 二等 二十七人에 及第(試官 趙士秀, 李浚慶)
1560年(明宗 庚申, 26歲) : 長子 宜藩 誕生.
1565年(明宗 乙丑, 31歲) : 僧 普雨 처단을 상소(高伯樑 應慶, 姜太蘇 禹 等)
1568年 3月 26日(宣祖 元年 戊辰, 34歲) : 母夫人 別世. 喪事와 祭禮 一切를 朱子家禮에 따르다.
1574年 5月 27日(宣祖 7年 甲戌, 40歲) : 次子 安藩 誕生.
1576年(宣祖 丙子, 42歲) 겨울 : 玉山書院 文元公 晦齋先生 祠堂 參拜.
1580年 3月 13日(宣祖 庚辰, 46歲) : 父公 別世. 參奉公(父公) 末年에 친구를 위하여 술놀이 하시기를 좋아하셔서 아름다운 계절을 맞이하면 손님들이 집에 가득하였다. 公께서는 힘을 다하여 이바지하시고 또한 그 뜻을 받들어 순종하시더니 돌아가시는데 이르러서는 슬퍼하고 상념하여 執喪을 制度에 넘게하고 엄하고 辛苦를 감내하시니 鄕里 사람들이 孝子라고 일컫더라. 服制를 마침에 다시는 벼슬길에 응하지 아니하시고 항상 고요히 한방에 앉으셔서 書籍과 史記를 읽으시어 의리를 강구하시고 날마다 詩와 禮로써 子弟들을 가르치시되 엄하게 과정을 세우셨다. 계신 곳에 龍溪書舍가 있으니 이것은 곧 參奉公이 창건하신 바인데 더욱 닦고 다스려서 마을 안에 자제들을 모아서 글을 읽고 學業을 익히게 하여 순순하게 달래고 권유하고 이끌어 주게 하셨다. 또 紫湖에 별당을 마련하여 오며 가며 쉬시고 또한 서식하시면서 詩와 술로써 스스로 즐겨하셨다.
-4月 20日 : 셋째 아드님 守藩 誕生.
1585年 가을(宣祖 乙酉 51歲) : 長子 宜藩이 成均館 生員에 합격.
1590年 7月(宣祖 庚寅, 56歲) : 조여수 덕기(曺汝○ 德驥), 금문원 난수(琴聞遠 蘭秀)와 함께 柳汝元 汀의 송호정사(松壕精舍)에서 산과 바다로 더불어 詩를 주고 받다.
1592年 4月 13日(宣祖 25年 壬辰, 58歲) : 壬辰倭亂이 발생. 식구들을 거느리고 騎龍山中(聖穴庵)으로 피난.
-5月초 義擧. 아드님 宜藩에게 이르기를 "이제 임금이 파천하셨으니 우리들이 어찌 草間에서 편안히 살 것을 구하겠는가"라고 하여 栢巖公(宜藩)이 이에 응해서 먼저 여러 형제들로 하여금 行伍를 짜고 격문을 만들어서 鄕兵을 모집. 이때 族弟(10촌) 昌臺(大任)가 그의 再從 大仁과 내방하여 선생을 뵈오니 서로 나라를 위하여 순절하기로 결심하고 군사를 모아 도적(왜적)을 칠 일을 의논. 鶴峰 金誠一선생 狀啓에 말하기를 "永川 進士 鄭世雅 등이 五月中에 처음으로 結約을 하고 鄕兵을 일으켰다"고 하였음. 향인들이 선생을 추대하여 義兵將을 삼았다. 鄭大任과 長子 宜藩이 향인 曺希益, 曺德驥, 曺珹, 李蕃, 鄭千里, 柳夢瑞 등으로 더불어 각각 스스로 정성을 다해서 군사를 모집하니 文武人 합하여 900여명이 되었다. 郡 서쪽 法淵( ) 위에다 壇을 설치하고 선생을 추대하여 大將을 삼고 崔壁南을 中衛將을 삼다.
-15日 왜적을 郡 서쪽 朴淵(현:영천시 화산면 석촌리)의 위에서 만나 크게 무찌르다. 이보다 앞서 鄭大任, 曺德驥, 曺珹, 李○郡, 金浩 등으로 하여금 곳곳에 복병을 설치케 하였는데 홀연히 왜적이 封庫 御使로 자칭하고 나타남에 諸將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公이 말씀하시기를 "이는 받드시 거짓이다"하여 모든 次將과 西面 伏兵將 朴應麒, 新寧 義兵將 權應銖 등과 합세하여 공격, 거의 소탕하고 兵器, 錢穀, 文書 등을 노획하다.
-6月에 招諭使 鶴峰 先生에게 節制하여줄 것을 청원하다. (초유사 : 난리가 났을 때 백성을 효유 하는일을 맡던 임시벼슬)
-7月初 兵使 朴晋이 선생을 義兵大將으로 삼다. 또한 招諭營에서 선생을 本郡의 義兵將에 명하다.
-26일 永川城을 포위하고 27일에는 적을 섬멸시킴.
-8月 7日에도 적을 慶州 慈仁縣에서 공격하다.(鶴峰狀啓)
-8月 19日, 朴晋, 權應銖, 鄭大任 등과 경주성 토벌을 꾀하여 安康縣에 이르다.(의병, 승려, 평민 등 5천여명)
-8月 21日, 長子 生員 宜藩, 生員 崔仁濟 등 수십명 전사. 영천, 경주성 회복. 포위된 상태에서 宜藩이 父公을 구하고자 적진에 들어갈 때 그의 종 億壽에게 "군사가 패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전사한 줄 알았음) 내 장차 도적들의 손에 죽기를 결심하였으니 너는 가거라"하였다. 이에 億壽가 울면서 말하기를 "주인과 종의 구분이 군신과 부자와도 같은데 종이 주인을 놓고서 어디로 가겠습니까"하고 적군과 싸우다가 주인과 더불어 전사하였으니 忠僕이었다. 宜藩의 屍身을 찾지 못하자 화살로 招魂(皐復)하여 靈筵을 집에다 설치하고 詩를 구해서 묘를 만들다. (선생께서 아드님의 시신을 거두지 못함을 슬퍼하시고 원혼이 의지할 곳 없음을 애석하게 여기셔서 원근의 친구에게 만사와 제문을 얻어 옛날 입던 의관과 함께 관안에 넣고 장사 지내니 모든 사람들이 詩塚이라고 하였다)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억수의 묘를 公의묘 階下에쓰다) ?亂離事蹟에 말하기를 "宜藩은 믿는 선비인지라 동료들이 그를 중히 여기더니 하루 저녁에 땅에 죽어버리자 그 시신을 잃어서 世雅가 宜藩과 평소에 잘 알고 사랑하던 이들에게서 詩를 구하여 무덤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鶴峰선생(右道監司)이 啓를 올려 전사자 포상 증직을 청하여 11월 21일에 宜藩에게 通德郞(정5품) 戶曹正郞을 증직하고 제사를 儀禮대로 행하다.
1593年 1月(宣祖 26年 癸巳, 59歲) : 長子 宜藩의 분향제를 행하다.
-11월 군사를 생원 曺希益에게 예속시키고 紫陽 옛터에 돌아오시다.
1594年 6月(宣祖 27年 甲午, 60歲) : 族弟 醴泉郡守 鄭大任 弔喪하다.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같이 하여 더불어 몸을 잊어버리고 국가에 순직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唐橋陣中(예천)에서 병을 얻어 돌아와서 일어나지 못했다. 선생이 애도해 마지않아서 그를 위하여 弔喪하고 喪事를 다스렸다.
1596年 9月 28日(宣祖 29年 丙申, 62歲) : 원근의 동지들과 八公山에서 맹세하시다. (왜구의 재침염려. 會盟錄과 唱酬詩가 있다)
1599年(宣祖 32年) : 紫湖精舍를 세워 벼슬에는 뜻이 없고 유유자적 하시면서 후진 양성에 힘쓰시다.
1600年 9月(宣祖 33年 庚子, 66歲) : 體察使 李元翼이 紫湖亭舍로 선생을 심방하다.
1602年 4月 18日(宣祖 35年 壬寅, 68歲) : 承仕郞(종8품) 軍資監奉事 제수 불취(不就) ? 圃隱선생 書院을 道一洞(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중건하다. 賜額받다.
1603年 10月(宣祖 36年 癸卯, 69歲) : 四子 守藩이 무과급제.
-11月 興海 曲江에서 놀으시다.
1605年 4月 16日(宣祖 38年 乙巳, 71歲) : 宣武原從功臣 3等으로 採錄되다.
-7월 三子 安藩 무과급제. 겨울 : 孫子 好仁(安藩의 子)을 孫慕堂 處訥에게 보내 수학토록 하다.
1607年 6月(宣祖 40年 丁未, 73歲) : 務功郞(정7품) 黃山道察訪 除授(오늘날 경남 양산, 물금 근처 큰 驛長으로 산하에 작은 역이 13개 있었음) 同月 宣敎郞(종6품)으로 승진.
-7월 承訓郞(정6품) 승진.
-8월 承議郞(정6품) 승진. 얼마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귀향.(역이 난리에 없어진데다 또한 동남의 요충지에 있어 지탱할 수가 없었는데 선생께서 폐한 것을 일으키고 쇠잔한 것을 소생시켜 너그러운 정치로 어루만지시니 아전과 卒兵들이 그를 감복하고 돌아온 뒤에 비를 세워 칭송함) 芝山 曺好益, 旅軒 張顯光, 蒼石 李埈, 慕堂 孫處訥, 錦溪 黃俊良, 蘆溪 朴仁老등 여러선비들이 때때로 찾아와 학문을 토론하시면서 유유자적 하셨다.
1609年(光海 元年 己酉, 75歲) : 守藩의 次子 好禮를 長子 宜藩의 養子로 삼다. 가을 芝山 曺好益 弔問하다.(輓詩가 있음)
1612年 閏11月 3日(光海 4年 壬子, 78歲) : 正寢에서 別世하시다.
-12月 9日 究理內 騎龍山 夏泉洞(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하천) 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내다.
1614年 3月 21日(光海 6年 甲寅) : 旅軒 張선생(顯光)이 글을 지어 致奠을 올리다.
1615年 1月 20日(光海 7年 乙卯) : 通政大夫 兵曹參議를 贈職.
-6월 5일 :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參贊官으로 贈職.
1619年 6月 29日(光海 11年 己未) : 嘉善大夫 兵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使 五衛都摠府 副摠官 贈職. 이상 3번 증직한 것은 아드님 守藩公의 亨難功으로 追贈된 것임.
1705年(肅宗 31年 乙酉) : 鄕人이 紫陽縣 日見峰 아래 祠堂을 세웠으나 얼마후 폐하다.
1732年 9月 19日(英祖 8年 壬子) : 資憲大夫 兵曹判書 兼 義禁府使 증직. 이때 栢巖公(宜藩)에게도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겸 經筵參贊官으로 증직이 되었다. 이는 五代孫 梅山公(重器)이 駕前, 즉 대가의 앞에 말씀을 올려서 이러한 증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755年 2月(英祖 31年 乙亥) : 詩塚(백암공 묘소)에 碑를 세우다. (비문은 弘文館 副提學 吳光運이 撰함)
1760年 6月(英祖 36年 庚辰) : 墓門에 神道碑(경상북도 지방유형 문화재73호)를 세우다.(領議政 趙顯命이 비문을 撰함)
1778年 3月(正祖 2年 戊戌) : 자손들이 環皐世德祠(영천시 임고면 선원동 대환)에 位牌를 奉安하다. 栢巖公을 配享하다.
1782年(正祖 6年 壬寅) : 實記 간행하다.
1784年 2月(正祖 8年 甲辰) : 조정에서 栢巖公 忠孝를 旌閭토록 명하다. 7代孫 生員 夏濬이 선생의 시호를 청하고 아울러 백암공의 정려를 청하다.
-8月 諡典을 판결해서 내리다.
-9月 6日 忠孝閣을 게설(揭楔:높이 세움)하다. 判書 蔡濟恭이 "忠臣孝子 贈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參贊官 成均 生員 鄭宜藩의 門"이라고 쓰고 世德祠 곁에 閣을 세우고 여기에 게제(揭題)하고 충효각이라 하였다. 이때 원근에서 모인 士林들이 수백명이나 되었다.
1788年 6月(正祖 12年 戊申) : 剛義公이라는 諡號가 내리다. 致果殺賊曰剛이요, 즉 과단성을 이루어서 적을 죽인 것을 剛이라 하고 先君後己曰義라, 인군(人君) 즉 나라를 먼저 하고 자기를 뒤에 하는 것을 義라 한다. 判書 洪良浩가 敎旨를 쓰고 吏曹佐郞 韓用龜가 가지고 오다.
1790年 初(正祖 14年 庚戌) : 紫湖精舍를 옛자리에 중건하다.
1793年 5月(正祖 17年 癸丑) : 시호 내린 事蹟을 신도비에 추각(追刻)하다.
1977年 3月(양력) : 江湖亭을 자양면 용산동 인구 마당지에서 영천댐 수몰로 인하여 성곡동 하절 서록으로 移建(경상북도 지방무형문화재 71호)
1998年 4月 21日(양력) : 壬亂護國 嶺南忠義壇에 長子 宜藩, 第三子 安藩, 第四子 守藩과 함께 위패가 봉안되다.(대구광역시 동구 효목1동 망우공원내)
◐ 호수실기(湖○實記)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모아 영천(永川)에서 적을 격퇴시킨 호수 정세아(鄭世雅:1535~1612)의 사력(事歷)을 수록한 책. 활자본. 8권 2책.
1781년(정조 5)에 6대손 일찬(一鑽)이 편집하고 이듬해 7대손 하유(夏遊) ·하세(夏洗) 등이 간행하였다.
권1은 세계도, 권2는 성관(姓貫) ·향리(鄕里) ·연보(年譜), 권3은 유고 ·유묵, 권4는 유사(遺事), 권5는 사실(事實) ·행장 ·묘비명, 권6 이하는 부록으로서, 권6은 아들 백암(栢巖)의 사적(事蹟) ·유고 ·유사, 권7은 포전(褒典), 권8은 자양 충현사사적(紫陽忠賢祠事蹟) 및 제록(諸錄)으로 되어 있다.
◐ 작품
遺稿 詩
與柳汝元汀 曺汝○德驥 琴聞遠蘭秀 登佛國寺影池樓 各吟一絶 得來字 (庚寅)
여류여원정 조여수덕기 금문원난수 등불국사영지루 각음일절 득래자 (경인)
良友不期來 登樓笑把盃 群賢次第坐 摠是濟川才
양우불기래 등루소파배 군현차제좌 총시제천재
柳汝元(汀) 曺汝○(德驥) 琴聞遠(蘭秀)와 더불어 불국사 影池樓에 올라서 각각 '來'字韻을 가지고 한 絶句를 읊었다. (庚寅 1590년)
좋은 친구 期約없이 찾아와서 누에 올라 웃으며 잔을 잡네. 群賢들이 차례로 앉았으니 모두 다 濟世할 人才로다.
次松壕精舍韻 柳汀亭
차송호정사운 류정정
樂水翁心又樂山, 能兼仁智自言閒, 精神莫費觀魚上, 事業將看戰馬間,
요수옹심우요산, 능겸인지자언한, 정신막비관어상, 사업장간전마간,
松壕精舍韻을 次韻하다.(柳汀亭)
물을 즐겨 늙은 마음 산을 또 즐겨하네 仁과 智를 兼했으니 저절로 閒暇롭다 노는 고기 바라보고 精神을 허비 말라 일이 장차 싸움터에 벌어짐을 볼 것이다.
與柳汝元, 曺汝○, 琴聞遠, 登朱砂山, 見金將軍斷石痕, 次汝○口號韻
여류여원, 조여수, 금문원, 등주사산, 견김장군단석흔, 차여수구호운
神翁書授讀兵年, 貫日孤忠已感天, 百鍊龍泉能斷石, 萬旗圍壘一無全
신옹서수독병년, 관일고충이감천, 백연용천능단석, 만기위루일무전
柳汝元, 曺汝○, 琴聞遠으로 더불어 朱砂山에 올라가서 金將軍이 돌을 자른 痕迹을 보고서 汝○가 韻을 부르기에 次韻하였다.
神翁이 冊을 주어 병서를 읽던 해에 해를 꿰뚫는 외로운 忠誠이여 이미 하늘이 감동했네. 百번이나 鍊磨해둔 龍泉의 寶刀는 돌이라도 베이리니 萬旗로 에워싸인 城도 온전할 수 없으리라.
與柳汝元 曺汝○ 琴聞遠, 題望夫石
여류여원 조여수 금문원, 제망부석
蠢爾蠻夷在島中, 誰能驅海振英風, 忘身殉國能全節, 堤上千年一箇雄.
준이만이재도중, 수능구해진영풍, 망신순국능전절, 제상천년일개웅.
柳汝元, 曺汝○, 琴聞遠으로 더불어 望夫石에 쓰다.
준동하는 오랑캐가 섬 속에 있으니 뉘 能히 바다 건너 英雄風을 떨칠손가! 몸을 잊고 순국해서 절의를 지킨 것은 박제상 한 사람이 천고의 영웅이다.
八公山會盟韻 (丙申)
팔공산회맹운 (병신)
兵場方見士無雙, 斷斷危○父母邦, 如我白頭何所補, 故携兒子自琴江.
병장방견사무쌍, 단단위침부모방, 여아백두하소보, 고휴아자자금강.
八公山 會盟韻(丙申 1596년)
치열한 싸움터에 둘도 없는 勇士있네, 순수한 높은 정성 부모의 나라로다. 白頭의 이몸으로 裨補할 바 있으랴만 짐짓 琴江의 壁村에서 아이들을 끌어낸다.
※ 금강 : 금호강
荒園中, 有一叢梅, 埋土勿 荊棘, 尙未開花, 見卽悽然, 未免有思人之念,
황원중, 유일총매, 매몰 형극, 상미개화, 견즉처연, 미면유사인지념,
因題拙句, 奉呈君輔(全三益)兄弟,
辛亥(1611년) 인제졸구, 봉정군보(전삼익)형제
寂寞園東寂寞濱, ○枝苔○雨中春,
적막원동적막빈, 소지태간우중춘,
憐渠今歲姑遲笑, 應待西行萬里人.
연거금세고지소, 응대서행만리인.
時季子守藩謫于關西
시계자수번적우관서
거칠어진 동산 속에 한 떨기 梅花가 가시에 묻혀 아직도 꽃이 피지 못한다. 이것을 보고 悽然해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因하여 拙句를 지어 君輔(金三益) 兄弟에게 올렸다.(辛亥) 적막한 동산 東쪽 적막한 시냇가에 이른 봄 비속에서 가지는 엉성하고 줄기는 이끼 끼네. 가련타 올해엔 디디게 피려나 西쪽 萬里 謫客을 기다리네. (이때 막내 아들 守藩이 關西에 귀양갔었음)
余於全君勉 三省壁上, 題克閭慶三字, 而聞有生子 因寄詩以賀
여어전군면 삼성벽상, 제극여경삼자, 이문유생자 인기시이하
克閭慶字書君壁, 待驗還疑此語虛, 今日得聞生貴子, 始知綿應不歸虛.
극여경자서군벽, 대험환의차어허, 금일득문생귀자, 시지면응불귀허.
내가 全君勉(三省)宅의 壁上에다가 "克·閭·慶" 三字를 써 붙였는데 아들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서 詩를 지어 보내어 치하하였다.
극,여,경 세 글자를 그대 집 벽 위에 써 붙이고 效驗있길 기대하나 도리어 虛言될까 의심터니 오늘에야 득남 소식 반갑게도 들려온다 비로소 알겠구나 그나마 응하여 헛되지 않은 줄.
餞李太守 惟弘
전이태수 유홍
去歲黃花五馬行, 今年楓葉一牛征, 無錢愧殺山翁○, 酌水淸江餞晩程
거세황화오마행, 금년풍엽일우정, 무전괴쇄산옹신, 작수청강전만정
李 太守(惟弘)를 餞別함
지난 해 菊秋 때에 五馬로 다니더니 올해 단풍들자 한 소로 떠나느냐. 돈 없음이 부끄럽구나 山翁의 전별을 하노니 淸江水 한 잔으로 늦은 길 전송하네.
和柳汝元贈韻 (庚寅)
화류여원증운 경인
情性發於詩, 其人想見奇, 工全談道夜, 理절借籌時,
정성발어시, 기인상견기, 공전담도야, 이절차주시,
放逐歌吟苦, 貞忠寤寐思, 能文兼武備, 可禦萬千師
방축가음고, 정충오매사, 능문겸무비, 가어만천사
류여원이 보내온 운에 화답하다. (1590년)
情과 性이 詩에 나타나니, 아마도 그 사람의 奇異함을 보리로다. 공부가 온전하긴 道學을 담론하는 밤이고, 理致가 밝기는 점대를 쓰는 때일세.
쫓겨나선 괴롭게 노래하며 읊조리고, 곧은 忠誠 자나깨나 생각하네. 문장에 능한데다 武를 겸비하니, 천만의 군사라도 막아낼 수 있으리라.
※ 주(籌) : 점대, 샘대 주, 샘놓을 주, 숫가지 주, 투호살 주.
宜樂堂, 次曺芝山韻,
의락당, 차조지산운,
(曺瓊兄弟友愛, 故芝山, 名其堂曰宜樂, 在郡南蒼水里.)
(조경형제우애, 고지산, 명기당왈의락, 재군남창수리.)
宜樂名何以, 於焉共瀉襟, 黃花庭爛○, 白鳥水浮○,
의락명하이, 어언공사금, 황화정난만, 백조수부침,
詩客思提筆, 遊人欲謝簪, 相酬琴酒趣, 誰似弟兄心.
시객사제필, 유인욕사잠, 상수금주취, 수사제형심.
宜樂堂에서 曺芝山韻을 次韻하다.
(曺瓊 형제가 우애하기 때문에 그 당을 "宜樂堂"이라고 이름하였다. 군 남쪽 창수리에 있다.)
堂名을 어찌해서 宜樂이라 하였는고 여기에서 함께 흉금을 펼침일세. 뜰 앞에 국화꽃은 난만하게 피어있고 湖水 위에 백조들은 한가로이 부침한다.
詩客들은 글쓰기를 생각하고 遊人은 벼슬길 사양하네. 주거니 받거니 거문고에 술의 흥취 누가 형제 마음 같으랴.
八公山會中, 各以字聯句, 丙申 會盟時.
팔공산회중, 각이자연구, 병신 회맹시.
堯庭命和叔 鄭世雅號湖○
요정명화숙 정세아호호수
팔공산의 모임에서 각기 자기의 字를 가지고 聯句를 지었다. 병신년(1596년) 회맹때(32명)
堯임금의 朝廷에선 和叔을 命하였고
次獨樂亭韻 (李知白山亭在圓覺)
차독락정운 (이지백산정재원각)
山勢依然巫峽長, 一區形勝擅南方, 濤聲出壑松千樹, 玉韻生庭竹數行,
산세의연무협장, 일구형승천남방, 도성출학송천수, 옥운생정죽수항,
不羨仲長田宅廣, 要同元亮北窓凉, 溫房朝日猶濃睡, 無客仍何起倒裳.
불선중장전택광, 요동원량북창량, 온방조일유농수, 무객잉하기도상.
독락정운을 次韻하다. (이지백의 산정이 원각에 있었음. 영천시 자양면 용산동 원각)
산세는 의연하게 巫峽처럼 길었는데 一區의 勝地가 南方에 으뜸이라. 파도소리 구름에서 나옴은 千樹의 솔 옥소리 뜰에서 생겨남은 몇그루 대나무.
仲長의 田宅이 넓음이 부러울 것 없으니 요컨데 元亮의 北窓이 시원함과 같으리라. 따뜻한 방 아침에 해가 떠 오르도록 오히려 깊은 잠 들었나니, 손 없으니 무엇 때문에 급히 옷차려 입을까.
※ 仲長 : 중국 後漢의 仲長統을 말하며, 벼슬하지 아니하면서 자기의 뜻에 따라 유유자적하는 사상의 소유자.
※ 元亮 : 사람 이름.
次五梅亭韻 ( 進士孫處訥溪亭, 在達城壽城村 )
차오매정운 ( 진사손처눌계정, 재달성수성촌 )
蕭灑茅齋得美名, 庭除手植五梅兄, 霜風冷蘂臨塘發, 雪月寒梢間竹生,
소쇄모재득미명, 정제수식오매형, 상풍냉예임당발, 설월한초간죽생,
○下○粘公主額, 澤濱還闕楚臣經, 主人心事君知否, 德與梅花一樣馨, (梅花一作玆花)
첨하만점공주액, 택빈환궐초신경, 주인심사군지부, 덕여매화일양형, (매화일작자화)
오매정운을 次韻하다. (進士 孫處訥 溪亭이 達城 壽城村에 있음)
소쇄한 띠재실(齋室)이 좋은 이름 얻었도다. 뜰 가에 손수 심은 五梅가 霜風의 차가운 꽃술 못에 임하여 피고, 雪月의 찬가지 대나무 사이에 솟았네.
처마(○下) 밑엔 부질없이 공주의 이마에 붙었는데, 연못가엔 도리어 어부사가 빠졌구나. 주인의 심사를 아느냐 모르느냐. 그 德과 그 梅花 한가지 향기로다. (매화를 자화라 하기도 한다)
※ 漁父辭 : 屈原이 지은 이소부(離騷賦)에 나오는 詩. 굴원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楚나라의 大夫이며 비극시인. 회왕(懷王)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참소를 당하여 이소부를 지어 忠諫하였으나, 용납되지 아니하여 호남성 상음(湖南省 湘陰)에 있는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음.
釣翁臺, 次文上舍繼朴韻, (臺在臨皐書院之東, 乃圃隱先生遊賞處也).
조옹대, 차문상사계박운, 대재임고서원지동, 내포은선생유상처야.
病眼登臨便自明, 孤臺臺上碧沙平, 千株柳色金絲拂, 一帶川流素練橫,
병안등임변자명, 고대대상벽사평, 천주류색금사불, 일대천류소련횡,
夙慕古人垂釣趣, 誰知今日賦詩情, 晩風入○淸香襲, 巖下殘梅送落英
숙모고인수조취, 수지금일부시정, 만풍입가청향습, 암하잔매송락영
조옹대에서 文上舍(繼朴)의 詩韻을 次韻하다. (臺가 臨皐서원의 東쪽에 있으니, 곧 圃隱先生이 노시고 구경하신 곳이다.)
병든 눈이 登臨함에 문득 절로 밝아지고, 외로운 대 위에는 푸른 모래 평평하다. 천그루 버드나무 금실을 드리웠고, 한줄기 흐르는 내는 흰 베를 펼쳤는 듯.
고인의 낙시 취미 일찍이 사모했으니, 오늘에 詩의 마음 그 누가 알겠는가. 늦바람이 잔에 드니 맑은 향기 곁드리고, 바위 아래 지는 매화 꽃잎을 흩날리네.
※ 上舍 : 진사(進士).
次姜公德文韻, (姜, 晋州人, 乃芝山友壻, 壬辰避兵于此地).
차강공덕문운, 강, 진주인, 내지산우서, 임진피병우차지.
懷璜雖未試嘉猷, 儒雅風流四十秋, 舊事記來無舊樂, 新詩吟罷有新愁,
회황수미시가유, 유아풍류사십추, 구사기래무구락, 신시음파유신수,
支離衰病浮生困, 漂泊東西歲月流, 世遠監河誰貸米, 辛勤奔走不能休.
지리쇠병부생곤, 표박동서세월류, 세원감하수대미, 신근분주불능휴.
강공(덕문)의 시운을 차운하다.(姜公은 晋州人으로, 芝山 동서이다. 壬辰年에 이곳으로 피란 왔었다.)
黃玉을 품고서도 아직 좋은 계책 시험하지 못하였고, 그럼에도 儒雅風은 사십년이 흘렀도다. 옛 일을 기억함에 옛 낙이 없고, 새 詩를 읊고나자 새 근심이 생기네.
支離한 衰病으로 浮生이 고달프고, 동서로 流離하여 세월만 흘렀도다. 監河의 세대와 머니 그 누가 쌀을 대주랴. 고생스럽게 분주함에 쉬지를 못하누나.
※ 監河 : 監河候로 西河의 현령(縣令).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움.
其二
自少疎○到白頭, 生涯冷落幾多秋, 田園荒處從奴懶, 缶詹石空來任婦愁,
자소소용도백두, 생애냉락기다추, 전원황처종노나, 담석공래임부수,
無酒共酬○我主, 有情遑恤感君流, 暗疎曾嫉○州俗, 今日題詩恨不休.
무주공수참아주, 유정황휼감군류, 암소증질기주속, 금일제시한불휴.
그2
어릴 때부터 소략하고 용렬하여 흰머리에 이르렀으니, 冷落한 생애가 몇 해나 되었는고. 종놈이 게으르니 田園이 거칠고, 쌀독이 비는 것은 아내의 근심이라.
술 없이 상대함에 주인 체면 부끄럽고, 인정으로 돌볼제는 그대에게 감사한다. 暗疎한 기주의 풍속을 일찍이 미워했더니, 오늘날도 詩 씀을 그치지 못함을 한하는가.
※ 缶詹 = ○ (항아리 담)
登紫湖精舍, 用前韻述懷.
등자호정사, 용전운술회.
萬山環抱一溪頭, 數架松○夏似秋, 觀物愛吟閑裏句, 傷時難遣醉中愁,
만산환포일계두, 수가송첨하사추, 관물애음한리구, 상시난견취중수,
生涯草草隨雲冷, 鄙吝輕輕逐水流, 蔬食只能供我飽, 更無思慮任浮休.
생애초초수운랭, 비린경경축수류, 소식지능공아포, 갱무사려임부휴.
자호정사에 올라 '前'운을 가지고 술회하다.
만산이 에워싸인 한 시내 머리에 두어칸 솔 처마는 여름에도 가을 같다. 물리를 살피매 한가로운 가운데 싯구를 즐겨 읊조리고, 시속을 상심함에 취중의 시름 떨치기 어렵구나.
하찮은 이내 생애 구름 따라 冷落하고, 鄙吝이 가벼워져 물을 따라 흘러간다. 나물밥 나물국에 배불릴 수 있으리니, 다시 아무 염려없이 부생에 맡기리라.
※ 비린(鄙吝) : 마음 속의 때, 찌꺼기.
其二
壯志期梟賊將頭, 殘骸驚却○邊秋, 有纓未遂終軍請, 無力空懷杜老愁,
장지기효적장두, 잔해경각빈변추, 유영미수종군청, 무력공회두로수,
衰病豈宜馳世路, 退閒端合玩淸流, 白鷗不厭江湖○, 靑眼從今至死休.
쇠병기의치세로, 퇴한단합완청류, 백구불염강호수, 청안종금지사휴.
그2
壯年의 뜻 적장 머리 벨 것을 기약했건만, 쇠잔해진 이내 몸이 귀 밑 털이 셀줄이야! 오랏줄이 있었지만 종군(終軍)의 請 못 이루고, 힘 없으니 부질없이 杜甫의 근심을 품었구나. 노쇠하고 병드니 어찌 출세길에 달릴손가? 한가로이 물러가서 淸流를 구경함이 내 분수에 적합하다. 백구도 江湖○를 싫어 않고 찾아주니, 靑眼이 이제부터 죽어서야 그치리라.
※ 終軍 : 漢나라 濟南 사람으로 字는 子雲이며, 使臣을 받들어 南越王을 유세(遊說:설득)하러 감에 긴 끈을 請하여 반드시 남월왕의 목을 매어 바치겠다고 한 사람.
※ 靑眼 : 阮籍이 죽을 때까지 좋은 사람만 사귀겠다고 쓴 말. 완적은 三國時代 위(魏)나라 竹林七賢의 으뜸으로 老莊을 좋아하였으며 好酒家로 거문고를 잘 탔음.
輓詩 輓曺芝山 好益 己酉
關西千里道路脩, 思兄憶弟添新愁, 殊方落日歸心絶, 彼此消息通無由,
관서천리도로수, 사형억제첨신수, 수방락일귀심절, 피차소식통무유,
無何壬辰遭大亂, 劇賊長驅欄海○, 主將竄走列城崩, 何人○氣能援袍,
무하임진조대란, 극적장구란해추, 주장찬주열성붕, 하인려기능원포,
誰知一介白面生, 忠憤激烈多奇謀, 倡義勸誘民響應, 忘身奮擊期復讐,
수지일개백면생, 충분격열다기모, 창의권유민향응, 망신분격기복수,
錦衣歸來眼忽靑, 握手不禁雙涕流, 相逢曾未閱一夏, 暝眩不使兄病○,
금의귀래안홀청, 악수불금쌍체류, 상봉증미열일하, 명현불사형병추,
天道如何至此極, 奄忽此日隔明幽, 卄載離懷更未攄, 綿綿此恨何時休,
천도여하지차극, 엄홀차일격명유, 입재이회갱미터, 면면차한하시휴,
瓦村村中結小盧, 四通固非幽人留, 眷彼芝山天所○, 山明水麗眞名區,
와촌촌중결소로, 사통고비유인류, 권피지산천소간, 산명수려진명구,
卜築年來種花竹, 數間茅屋堪優遊, 心源不受一塵侵, 胸次灑然自悠悠,
복축연래종화죽, 수간모옥감우유, 심원불수일진침, 흉차쇄연자유유,
家貧奉祭盡愛敬, 至誠自然具庶羞, 晴窓坐讀聖賢書, 上對羲軒下程周,
가빈봉제진애경, 지성자연구서수, 청창좌독성현서, 상대희헌하정주,
涵濡義理誨後進, 遠近聞風爭來遊, 顔淵陋巷邵雍窩, 樂在其中又何求,
함유의리회후진, 원근문풍쟁래유, 안연누항소옹와, 낙재기중우하구,
閒來有時携學徒, 淸池小艇聊夷猶, 朝廷不識這裡意, ○使五馬驚眠鷗,
한래유시휴학도, 청지소정료이유, 조정불식저리의, 만사오마경면구,
無端一夕鵬鳥飛, 草草人事如浮○, 大德不壽理難究, 伯道無兒天可尤,
무단일석붕조비, 초초인사여부구, 대덕불수이난구, 백도무아천가우,
靑孀雖慘有依倚, 繼後猶能守箕○, 負○遠來金學士, 飮泣秋天搔白頭,
청상수참유의의, 계후유능수기구, 부급원래김학사, 음읍추천소백두,
門人金堉, 來治其喪故云云, 文章縱云如過鳥, 道德不磨傳千秋, 擧鄕祖送向何之,
문인김육, 내치기상고운운, 문장종운여과조, 도덕불마전천추, 거향조송향하지,
一髮松靑是先丘, 松靑 山名.
일발송청시선구, 송청 산명.
조지산(호익)을 輓하다.(乙酉 1609년)
관서의 천리길에 도로가 멀었는데, 형제간의 생각으로 새 근심을 더하도다. 변방에 해가 지니 歸鄕心이 끊어지고, 피차간에 소식 알 길이 전혀 없다.
까닭없이 임진년에 큰 난리가 일어나, 사나운 도적들이 승승장구 해변을 유린한다. 主將들은 도망쳐서 列城들이 무너지니, 어느 누가 기운 내어 구원할 수 있으려나.
누가 일개의 白面書生, 忠憤心이 激烈하고 奇謀가 허다함을 알리요. 의병을 始倡하고 鄕士를 권유하니 군민이 響應하고. 원수갚길 기약하고 몸을 잊고 분투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금의환향하니 눈빛이 홀연히 푸르고 빛이 나며, 서로 만나 악수하니 눈물이 절로 난다. 서로 만나 한여름도 지나지 못한 것 같은데 어느덧 병이 드니, 명약이 있다한들 兄의 병은 낫지 않네.
천도는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는고, 갑자기 하루만에 유명을 달리하는구나. 이십년 품은 회포 마침내 터득치 못하고, 면면한 이 원한을 어느 때나 그치려나.
와촌의 마을 안에 작은 집을 얽었으나, 사방으로 통달하여 幽人이 머무를 곳 진실로 아니로다. 저 芝山 바라보니 하나님의 아낌이라, 산천이 수려하니 진실로 명승이라.
卜築한지 일년 花竹을 심어두니, 數間의 茅屋이나 견디어 놀만하다. 마음은 청백하여 한 티끌도 더럽힐 수 없고, 가슴속은 灑然하여 스스로 悠悠하다.
집은 비록 가난하나 제사를 모실 제는 愛와 敬으로, 지성 다하니 저절로 庶羞가 갖춰진다. 맑은 창에 홀로 앉아 성현의 글을 읽으니, 위로는 伏羲軒轅 아래로는 明道○溪 모시고 대하였다.
의리를 함양하여 후진을 가르치니, 원근이 소식 듣고 다투어 찾아온다. 顔淵의 陋巷이요 康節의 집이로다, 낙이 그 안에 있으니 무엇 다시 구하리오.
한가한 중 때때로 학도를 이끌면서, 맑은 못에 작은 배로 태평하게 지내도다. 조정에선 이런 뜻 알지 못하고, 부질없이 敎旨 내려 자는 백구 놀라게 한다.
까닭 없이 하룻밤에 백구가 날라드니, 하찮은 우리 일이 뜬 거품 한가지라. 大德이 不壽하니 天理는 알 수 없고, 伯道가 無子하니 하늘을 탓하리라.
靑孀은 불쌍하나 의지할 바 없지 않고, 뒤를 이은 양자 있어 살림 世業 지켜간다. 멀리서 책을 지고 찾아 배운 金學士가, 흰머리 긁으면서 슬피운다.
門人 김육이 와서 그 장례를 치루었기 때문이다. 문장은 이르기를 지나는 새 같다하나, 도덕은 갈리지 않고 천추를 전하도다. 온 향인 보내오니 어디로 가시는고 松靑山 한줄기에 선영 언덕 그곳이다.
※ 伏羲軒轅(복희헌원) : 복희는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제왕, 또는 신으로 三皇의 한사람. 헌원은 五帝의 한사람.
※ 明道○溪(명도염계) : 명도는 程顥의 號, 북송 중기의 유학자. 염계는 周敦○의 號, 송대의 유학자.
※ 顔淵(안연) : 顔回의 字, 공자의 수제자로 十哲의 한사람.
※ 康節(강절) : 邵雍의 諡號, 중국 송대의 학자·시인.
便紙
寄安藩守藩 (乙未)
邇來未知汝等好在耶, 爲慮實深, 項籍傳印出紙送去, 汝兄弟中親自入院,
이래미지여등호재야, 위려실심, 항적전인출지송거, 여형제중친자입원,
使南山卽爲印出, 別定奴子, 急速來傳至可, 此處旱氣太甚, 失農, 丁寧前頭生活,
사남산즉위인출, 별정노자, 급속내전지가, 차처한기태심, 실농, 정녕전두생활,
誠爲可慮, 汝等勿視尋常, 而勸奴輩, 力作農事, 使無餓死之患, 亦可.
성위가려, 여등물시심상, 이권노배, 역작농사, 사무아사지환, 역가.
안번·수번에게 부친다. (1595년)
그 동안 너희들 잘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깊이 염려가 된다. 항적전(項籍傳)을 찍어낼 종이를 보내니 너희 형제 중에서 친히 院에 들어가 南山으로 하여금 곧 인출하게 하라.
따로 종을 시켜서 급히 전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이곳은 가뭄이 너무 심해서 농사를 잃게 되니 틀림없이 앞으로 생활이 염려가 된다.
너희들은 심상히 여기지 말고 종들을 시켜서 힘껏 농사를 지어 굶주리고 죽는 걱정을 없게 하는 것이 좋겠다.
※ 項籍傳 : 중국 春秋五覇의 하나인 楚覇王의 이야기.
寄安藩守藩 (庚子)
近未知汝等安否, 心慮萬萬, 父自七月念後, 齒痛發作, 晝夜苦劇,
근미지여등안부, 심려만만, 부자칠월념후, 치통발작, 주야고극,
且此處旱氣太甚, 民無○産, 將有流離之患, 爲守令者寧無○於心乎,
차차처한기태심, 민무파산, 장유유리지환, 위수령자녕무괴어심호,
嶺南則今年農何如, 漠然不聞, 爲慮不已, 今科擧無事過行耶,
영남즉금년농하여, 막연불문, 위려불이, 금과거무사과행야,
邑中幾人參榜耶, 歸便詳細通視爲可, 權君何以連命耶, 如有救急之勢,
읍중기인참방야, 귀편상세통시위가, 권군하이연명야, 여유구급지세,
顧念亦可, 細木一疋覓送, 傳給爲可.
고념역가, 세목일필멱송, 전급위가.
안번·수번에게 부친다. (1600년)
근래에 너희들 안부를 알지 못하니 천만번이나 깊이 염려가 된다. 아비는 칠월 스무날부터 치통이 발작해서 주야로 고통스럽다.
이곳에 또한 가뭄 기운이 너무 심하다. 백성들이 산업이 없어 장차 유리할 걱정이 있으니 수령된 자가 어찌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영남엔 금년 농사가 어떠한고. 막연히 듣지 못하니 끊임없이 염려된다. 이번 과거는 무사히 통과했느냐.
읍중에서 몇사람이나 참방했느냐. 돌아오는 편에 상세히 알려주면 좋겠다. 권군은 어떻게 연명하느냐. 만일 구급해야 할 사세거든 돌보아 주는 것이 또한 좋을 것이다. 세목 한필 찾아 보내니 전해주었으면 좋겠다.
[참고문헌: 宣祖修正實錄, 正祖實錄, 嶺南人物考, 永川邑誌, 壬辰戰亂史, 湖○實記, 慶尙北道史 上(慶尙北道史編纂委員會, 1983).(李樹健) ]
[출처] www.yunilj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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