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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일鄭씨'문계공파

*[남성재] 2008. 滎陽公 春享祭

by fireball'Flee 2022. 7. 25.

 

 

 

           *滎陽公 春享祭*          

- 2008.04.06 -

 

 

 

 

 

 


 * 남성재 *  

 --------------------------------------  ( 南城齋 )   -------------------------------------- 

 

경북 포항시 남구 대송면 남성리 465

 

 

 

고려 의종때 한림학사 추밀원 지진사를 지낸 영일정씨의 시조 형양공 정습명(?∼1151)의 묘단하재숙지소로서, 1998년 4월 13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02호로 지정되었다. 연일정씨 형양공파 종중이 소유한다. 1722년 후손들이 묘소에 묘단을 짓고 제사를 지냈으며, 1742년 현 위치에 묘단과 석상을 신축하였다. 이후 1751년에 묘단 위에 비를 세웠으며, 이듬해 1752년에 비로소 재실을 건립하였다. 창건한 재실이 오래 가지 못하고 퇴락하여 경사가 완만하고 지대가 높은 곳에 1784년에 재건하기 시작하여 1785년에 19칸 규모로 완성하였다.

러나 규모에 비해 재목이 약하여 기둥이 기울고 도리가 처지며 서까래가 부러지는 등 많이 훼손되어 1801년에 옛 관청의 객사에 개축하기 시작하여 정당 3칸, 재실 4칸, 부곡채를 합하여 총 14칸으로 1808년에 완성하였다. 이것이 현존하는 남성재의 모체이다. 1858년부터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며, 1868년에는 대문채를 건립하였다. 1897년, 1925년, 1928년에 각각 중수하였고, 1939년에는 동·서재를, 1962년 대문채, 1965년 재사를 개축하였다.

 

 

------------------------------------------------------------------------ [안내문] --------------------------------------------------------------------

 

 

일정씨 시조. 휘는 습명, 호는 동하이나 세칭 형양선생이라 한다.

고려의 명신으로 일찍 항공문과에 급제하여 예종, 인종, 의종 등 삼왕조를 보필하였으며

관직은 한림학사와 추밀원지주사 등을 역임하였다.

높은 학식으로 삼국사기 편찬에 참여 하였으며

홍주 소대현(충남 태안)에 운하를 파기도 하였고

이어서 시폐 십조목을 상주하여 문란하던 정국을 바로 잡으니

인종의 더욱 두터운 신임으로 태자 사부를 겸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병으로 한동안 휴양 중에 있을 때

간신들의 무고로 이곳 영일에 귀향되어 약을 받아 1151년 3월 21일에 졸 하셨다.

선생의 묘소는 전함이 없이 5백여 년을 지내오다가

조선조 경종2년(1722년)에 읍성의 남쪽 구석에 후손들이 처음으로 묘단을 쌓고 제사를 올린 후

영조 때 이곳에 단소가 이루어졌다.

영천에 세거후손인 거유, 만양, 규양 형제의 발의로 석현 세복 등이 추진하여

이곳에 있던 영일관아를 철거 시킨 후 그 자리에 설단을 하고

단하에 남성재를 지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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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송면 남성리에는 .....

이 지방의 대성인 영일정씨 시조인 정습명을 제향하는 남성재와 그의 신도비가 성터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현청을 고읍리로 옮기기 전 새로이 부임하는 현감마다 죽게 되어 현감으로 부임하려는 사람이 없었던 중 담력이 좋은 한 선비가 자청하여 현감으로 부임하여 전임현감의 사인을 조사하고자 밤을 세우던 중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내가 누운 자리에 무엄하게 현청을 지었으니 빨리 옮겨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고 하였다. 현감이 대답하기를 "정확히 묘자리가 어디입니까? 가르쳐 주시면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라고 하니

"내일 새벽 일찍 까치가 한 마리 날아올 것이니 맨처음 땅 위에 앉은 자리가 내가 묻힌 자리니라." 고 일러 주었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과 밤을 세운 피로감에 지쳐 잠시 졸고 있는 사이 까치소리에 놀라 깨어보니 까치는 벌써 여러 곳을 뛰어 다니고 있어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으나 그 부근을 조사하여 정습명의 묘역임을 밝히고 현청을 옮겼으며 제사 지내게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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