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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일鄭씨'문계공파

*[滎陽] 남성 세덕송

by fireball'Flee 2022. 7. 25.

2009. 3. 21.

 

 

 

 

         *南城.世德頌*          


 

 

이 南城齋(남성재)는 迎日鄭氏 始祖(영일정씨 시조) 滎陽先生(형양선생)의 墓 壇下齋 宿之所(묘 단하재 숙지소)로서 全 宗族(종족)의 象徵的인 宗堂(상징적인 종당)입니다. 始祖(시조)의 諱는 襲明(휘,습명)이요 字는 未傳(자,미전)이며, 號는 東河(호,동하)이나 世上에서는 滎陽先生(형양선생)이라 불리어 옵니다.

 

性稟(성격)은 强直하고 快活(강직,쾌활)했으며 智仁勇(지인용)을 兼備(겸비)했던 世間의 偉人(세간의 위인)으로 睿宗 ․ 仁宗 ․ 毅宗(예종.인종.의종) 三王朝의 重臣(삼왕조의 중신)으로서 文名(문명)과 功德(공덕)이 높았던 名賢(명현)이었습니다. 

일찍 鄕貢文科에 及第(향공문과 급제)하시고 少年時節(소년시절)에 지었던 名詩 石竹花(명시 석죽화)로 因(인)하여 王命(왕명)으로서 玉堂에 補(옥당에 보)했다가 西京都事를 歷任(서경도사 역임)하시고 仁宗 元年(인종 원년)에는 王命(왕명)을 받들고 다시 西京(서경)으로 나가서 八十間(팔십칸)에 이르는 巨刹을 創建(사찰창건)하고  翌年(익년)에는 軍卒(군졸) 數千(수천)을 徵發(징발)해서 西海島에 運河(서해도 운하)를 파기도 했습니다. 그 翌年(익년)에는 妖僧 妙淸(요승 묘청)이 西京에서 反亂(반란)을 일으키자 先生(선생)은 水軍 四千 六百餘名(수군 4,600여명)과 戰船 四百餘隻(군함 400여척)을 이끌고 敵(적)의 進路를 封鎖(진로 봉쇄)하여 戰勢를 逆轉(전세 역전)시킴으로서 文武(문무)를 兼全(겸전)했던 先生(선생)의 名聲(명성)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平亂後(평란후)에는 國子監事業 兼 中書門下省起居注(국자감사업 겸 중서문하성 기거주) 및 知制誥(지제고)를 拜命(배명)해서 王政(왕정)을 도우며 三國史記의 編修(삼국사기 편수)를 主幹(주간)하여 東國鼎立 千年史(동국정립 천년사)를 밝혔고 그 後에는 時弊十條目을 上奏(시폐10조목 상주)하여 기어코 그를 施行(시행)시킴으로서 紊亂(문란)했던 國政(국정)을 바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 後(후)에는 禮部侍郞 兼 太子師傅(예부시랑 겸 태자사부)가 되어서 愚鈍(우둔)한 太子(태자)를 깨우치게 하였더니 그 父王 仁宗(부왕 인종)은 先生(선생)을 唯一(유일)한 將來의 輔弼者(장래 보필자)로 指目(지목)하여 臨終時(임종시)에는 特別顧託(특별고탁)으로서 新王朝의 輔政(신왕조의 보정)을 依賴(의뢰)하였습니다.

 

그로 因(인)하여 先生은 承宣(승선)을 거쳐서 樞密院 知奏事(추밀원 지주사)가 되어 新王 毅宗(신왕 의종)을 輔弼(보필)해서 그 愚昧(우매)했던 王을 太平盛代(태평성대)의 文好王(문호왕)으로 불리어지게 하는 등 王道政治(왕도정치)의 極致(극치)를 이루어서 高麗文化의 絶頂期(고려문화 절정기)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不幸(불행)하게도 先生을 猜忌(시기)하던 奸臣(간신)들의 誣告(무고)를 입고 迎日로 流配(영일 유배)되어 와서 1151년 3월 21일 약을 받아 世上(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後 子孫(자손)들은 永川(영천)으로 옮겨가서 世傳(세전)하며 八派로 分派(8파 분파)되었으니 一派(제1파)는 東方理學之祖(동방이학지조) 圃隱先生 家門(포은선생 가문)이요, 二派는 靈山 儒學敎導(영산 유학교도)였던 生員公(생원공) 文裔의 家門(문예가문)이요, 三派는 文繼公의 後(문계공의 후)이며, 四派는 文孫公의 後(문손공의 후)입니다. 五派는 左軍司正公(좌군사정공) 文備의 家門(문비의 가문)이요,

六派는 正郞公정랑공) 文彧의 後(문욱의 후)이며, 七派는 竹山 萬戶公(죽산 만호공) 亨之 後(형지의 후)요, 八派는 義禁府都事公(의금부도사공) 希孫의 後(희손의 후)입니다.  

 

家乘의 世傳(가승의 세전)에 對(대)해서는 明宗 癸丑年(명종 계축년)에 慶尙北道 兵馬節度使(경북 병마절도사)였던 一派의 林軒公 世弼(임헌공, 세필)에 依(의)해서 創刊(창간)되었으나 壬辰倭亂(임지왜란)으로 因하여 傳授(전수)된 文稿(문고)가 없고 八派 都事公(도사공)의 世系時(세계시)만 傳(전)해 오다가 仁祖 己丑年(인조 기축년)에 五派의 鳳林大君 師傅(봉림대군의 사부)였던 雙峯公 克後(쌍봉공 극후)의 執筆(집필)로 二派 暘溪公 好仁(양계공 호인)이 詩任 晋州牧使(시임, 진주목사)로서 刊行(간행)한 世譜(세보)가 源派錄(원파록)으로 世傳(세전)하면서 英祖 甲午年(영조 갑오년)에 再刊(재간)되었고, 高宗 乙丑年(고종 을축년)에 續譜(속보)가 나왔다가 1981년에 現行本(현행본)이 刊行(간행)되어서 行于世(행우세)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榮枯盛衰(영고성쇠)의 激浪(격랑)을 헤쳐가며 줄기차게 이어진 家門(가문)의 世德(세덕)은 萬古忠節 圃隱先生(만고충절 포은선생)의 뒤를 이어 國家 有事時(국가 유사시)마다 忠臣(충신)과 烈士(열사)가 代(대)를 이어서 家門의 名譽(가문의 명예)를 빛내었습니다.

始祖의 墓所(시조묘소)는 그 後 滄桑(창상)이 구비치는 渦中(와중)에서 失傳(실전)하여 英祖朝(영조조)에 永川(영천)의 塤篪叟 兄弟分(훈지수 형제) 이 設壇(설단)을 擧論(거론0하여 五懷公(오희공) 碩玄(석현)과 晩隱公 世復(만은공 세복) 등이 積極 推進(적극 추진)해서 南城(남성)에 있던 迎日縣官衙(영일현관아)를 撤去(철거)시키고 그 자리에 設壇(설단)해서 壇下(단하)에는 南城齋(남성재)를 지어 全國 宗親(전국 종친)들이 每年 雙十節(매년 쌍십절)에 來會(내회)하여 香火(향화)를 받들며 山下에 數萬坪 位土(수십평 위토)를 購入(구입)해서 墓壇을 守護(묘단수호)하고 있습니다.

 

이 墓壇(묘단)의 主脈(주맥)은 慶州 東垈山의 曼瑚峯(경주 동대산 만호봉)에서 東走(동주)한 雲梯山(운제산)이요, 太白(태백)이 日月(일월)을 거쳐 八角一枝(팔각일지)가 千里에 南走(천리남주)하여 北弟山(북제산)과 對岸(대안)한 南兄山(남형산)이 靑龍(청룡)이며, 黃龍山(황룡산)에서 力降(역강)한 陣田山(진전산)이 白虎(백호)입니다. 案(아)은 人花峯(인화봉)으로 壇所(단소)는 蜈蚣穴(오공혈)이요 人花峯(인화봉)은 蚯蚓穴(구인혈)로서 해마다 秋夕(추석)날이면 이 地方 士女(사녀)들의 償月登峯(상월등봉)으로 因(인)하여 人花滿山(인화만산)이라 東國 八名山(동국 팔명산)의 第一名山(제1명산)으로 傳(전)해 옵니다.

 

姓孫(성손)들은 바야흐로 時流의 世俗(시류의 세속)에 맞춰서 齋長(재장)과 有司(유사)로서 處理(처리)하던 齋業務(재업무)를 大宗會(대종회)로 改編(개편)하고 1994년부터 享祀(향사)를 每年(매년) 봄철로 옮겨서 陽曆四月(양력4월) 첫째 日曜日(일요일)로 改定(개정)하여 當日 正午詩(당일 정오시)에 行祀(행사)하고 人義之道(인의지도)와 忠孝之節(충효지절)을 世承家訓(세승가훈)으로 삼으며 全國宗親(전국종친)들이 渾然一體(혼연일체)가 되어서 先祖(선조)의 遺業(유업)을 이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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