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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일鄭씨'문계공파

*[문계]'정습명史' - 관련용어 및 수성사적(受姓事蹟)

by fireball'Flee 2022. 7. 25.

2009. 3. 21
[曰, 백과사전] ....

 

 

*Ahh, 정습명*

(鄭襲明, ? ~ 1151 ) 

 


  고려시대의 문신 / 본관 : 연일 / 활동분야 : 정치

  본관 연일(延日). 향공(鄕貢)으로 문과에 급제, 내시(內侍)에 들어갔고

인종 때 국자사업(國子司業)·기거주(起居注)·지제고(知制誥)를 역임,

 최충(崔沖)·김부식(金富軾) 등과 함께 '시폐 10조(時弊十條)'를 올렸으나 거부당했다.
1146년(인종 24) 예부시랑이 되어 태자(太子:毅宗)에게 강서(講書)하고,

공예왕후(恭睿王后)가 둘째 아들 대령후(大寧侯)를 태자로 세우려는 것을 저지,

인종의 신임을 얻어 승선(承宣)에 올랐으며,

1149년(의종 3) 한림학사에 이어 추밀원주지사(奏知事)를 지냈다.

선왕의 유명을 받들어 의종에게 거침없이 간함으로써 왕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 지제고 知制誥    
  고려시대에 국왕이 반포하는 조서(詔書)·교서(敎書) 등의 글을 지어 바치는 일을 맡아보던, 한림원(翰林院)·보문각(寶文閣)의 관원이 겸직하던 관직.
  한림원·보문각의 관원이 이를 겸직할 때는 내(內)지제고, 다른 관서의 관원이 겸직할 경우에는 외(外)지제고라 하였다. 특히 문장에 뛰어난 사람을 뽑아 이 직책을 맡겼는데, 성종 때에는 50세 미만의 문관으로 지제고를 역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한림원에서 달마다 시(詩)·부(賦)를 출제하여 문학을 장려하였고, 말기에도 지제고가 시험관이 되어 문관들의 문학 실력을 시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지제교(知製敎)로 개칭하였다


      -- 추밀원 樞密院   
  고려시대 왕명의 출납, 궁중의 숙위(宿衛) 및 군기(軍機)를 맡아본 국왕의 비서기구
중추원(中樞院)의 후신으로, 1095(헌종 1)∼1275년(충렬왕 1), 1356(공민왕 5)∼1362년(공민왕 11)까지 존치되었으며, 중추원·중대성(中臺省)·밀직사(密直司)·광정원(光政院) 등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1356년(공민왕 5) 밀직사를 중추원으로 고쳐 기구를 개편하고, 판원사(判院使:종2품) 1명, 원사(院使:종2품) 2명, 지원사(知院使:종2품)·동지원사(同知院使:종2품) 각 1명, 정3품의 부사(副使) 2명, 첨서원사(簽書院使)·직학사(直學士)·지주사(知奏事)·좌승선(左承宣)·우승선·좌부승선(左副承宣)·우부승선 각 1명, 정7품의 당후관(堂後官) 2명의 관원을 두었다.

 


[품계 品階] ------------------------------------------------------------     
옛 벼슬아치의 관계(官階).
관원의 등급을 품(品)·유품(流品)·관품(官品)이라 하고, 품(品)의 고하(高下)에 관한 정식(程式)을 품계·품질(品秩)·관계(官階)·직품(職品)이라 한다.
  품계 제도는 중국의 수(隋)·당(唐)시대에 확정되었으며, 한국에서는 고려에서 995년(성종 14) 이를 모방하여 사용하고,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어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각 품을 정(正)·종(從)으로 나누어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품으로 하고, 다시 종6품 이상의 정·종은 각각 상(上)·하(下)의 2계(階)로 나누어, 정3품 상계(上階)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은 당상관(堂上官), 정3품 하계(下階)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하 종6품까지를 당하관·참상(參上)이라 하고, 정7품부터 종9품까지를 참하(參下:參外)라 하여 구분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품계는 사실상 30계(階)로 나누어지고, 각 계는 종친(宗親:王族)·의빈(儀賓:왕의 사위)·동반(東班:文官)·서반(西班:武官)·잡직(雜職)·토관직(土官職)별로 그 품의 명칭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정식 관직명칭은 이와 같은 계(품계)에다 사(司:소속)·직(職:직위)의 순으로 부르게 되어 정1품 영의정인 경우 그의 정식 관직명칭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錄大夫:階) 의정부(議政府:司) 영의정(領議政:職)이라 한다.
  또한, 내명부(內命婦:王宮·世子宮)·외명부(外命婦:宗親·文武官의 妻·公主)라 해서 왕족이나 양반의 처에게도 각기 남편의 품계에 상응하는 품계와 그에 해당하는 명호(名號)를 부여하였다.
  조선시대의 품계는 1894년 갑오개혁 때 관제개혁하여 1품·2품을 칙임관(勅任官), 3품·4품·5품·6품을 주임관(奏任官), 7품·8품·9품을 판임관(判任官)이라 하고, 칙임관을 4등, 주임관을 6등, 판임관을 8등으로 각각 나누었다.

 

 

 

[受姓事蹟] ----------------------------


  智伯虎 賜姓鄭氏
新羅儒昭王(新羅三世漢建武間) 9年, 壬辰春 改辰韓六部之名 各 賜姓 李 崔 鄭 孫 裵 薛 辰韓第4○山○支部其長 曰 智伯虎 初降干花山至是以○支爲本彼部姓鄭(高麗太祖時改六部以本彼部) 通仙府令東○巴等村蓋我東之鄭其得姓之初當在○○(東京誌更子補入)


-- ---------사성
  한국에서 중국식 성씨가 사용된 것은 삼국시대 이후로 추측되는데, 처음에는 소수의 지배계급들이 그 신분의 고귀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하였고, 고려시대로 들어오면서 점차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 씨족들이 처음 성을 사용하게 되는 과정은 보통 세 가지로 정리되는데, 매우 일찍부터 사용되어 그 유래를 알 수 없는 것, 본관의 시조로 추정되는 사람이 스스로 자칭하는 것, 그리고 국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는 것 등이다. 사성의 최초의 사례는 신라 유리왕(儒理王)이 고유의 씨족명을 지니고 있던 6부(部)의 촌장들에게 각각 이(李)·최(崔)·손(孫)·배(裵)·정(鄭)·설(薛) 등의 성씨를 하사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에 특별한 공헌을 세운 신하에게 국성(國姓)인 왕씨(王氏)를 하사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고려 초기에는 군현단위로 본관제(本貫制)를 시행하였는데, 이것이 지방의 많은 지배층들에게 중국식 성씨를 자칭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성씨를 칭한 사람은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족보에서 시조(始祖)로 기록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사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후 공을 세운 경우, 외국인이 투화한 경우, 임금의 이름자를 피하는 경우 등에도 사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 [姓]
 즉, 한 혈통을 잇는 겨레붙이를 일컫는다.

그러나 이 성이 고대부터 사용된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始祖)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 하면서 성을 고씨(高氏)라 하고,

동시에 신하인 재사(再思)에게 극씨(克氏), 무골(武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默居)에게 소실씨(小室氏)를 사성(賜姓)하였으며,

백제는 온조(溫祚)가 부여(扶餘)에서 나와 성을 부여씨(扶餘氏)라 하였다.


  한편 신라에는 박(朴)·석(昔)·김(金) 3성의 전설이 있고,

제3대 유리왕(儒理王) 때는 6부(部)에 사성하였으니,

즉 양부(梁部)에 이씨(李氏), 사량부(沙梁部)에 최씨(崔氏),

점량부(漸梁部)에 손씨(孫氏), 본피부(本彼部)에 정씨(鄭氏),

한지부(漢祗部)에 배씨(裵氏), 습비부(習比部)에 설씨(薛氏)의 성을 주었다 하며,

가야국(伽倻國)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은 황금알에서 태어났으므로 김씨라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기록들은 한국은 고대 부족사회 때부터 성을 사용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그것은 모두 중국문화가 수입된 뒤 지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문헌상으로 한국에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 건국 초기인 1세기 무렵부터이고,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近肖古王) 때부터이며,

신라는 6세기 진흥왕(眞興王) 때부터라고 보여진다.

당시에는 성을 가질 때, 대개 왕실의 성을 따라 썼으니,

즉 고구려는 고씨, 백제는 여시(餘氏), 신라는 김씨를 쓴 사람이 가장 많고,

그 밖의 성을 가진 수효는 얼마 되지 않았다.

 

고구려의 성으로는

을(乙)·예(禮)·송(松)·우(優)·우(于)·주(周)·연(淵)·명림(明臨)·을지(乙支) 등 약 20종,

백제는 진(眞)·해(解)·사(沙)·연(燕)·백(藏)·국(國)·목(木)·협(進) 등 8족을 비롯하여

부여·사마(司馬)·수미(首彌)·고이(古爾)·재증(再曾)·흑치(黑齒) 등 약 20종,

신라는 박·석·김 3성을 비롯하여

6부의 이·최·정·손·배·설과 장(張) 등 10여 종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들은 일반사람들이 모두 사용한 것이 아니고 주로 왕족과 귀족계급에서 사용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중국을 왕래한 사람들은 모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김인문(金仁問)·김지량(金志良)·최치원(崔致遠)·박계업(朴季業)·장보고(張保皐) 등은 그 좋은 예이다. 고려의 개국공신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도 처음에는 성이 없었다.

그들의 초명(初名)은 홍유는 홍술(弘述), 배현경은 백옥(白玉), 신숭겸은 삼능산(三能山), 복지겸은 복사귀(卜沙貴)로만 되어 있었는데, 뒤에 이들은 각 성의 시조가 되었으니 즉,

 홍유는 부계홍씨(缶溪洪氏), 배현경은 경주배씨(慶州裵氏), 신숭겸은 평산신씨(平山申氏), 복지겸은 면천복씨(汚川卜氏)의 시조이다.

그후 고려 중엽부터는 일반에서도 성을 널리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ㅁㅁㅁㅁ  鄭襲明♡墓誌銘  ㅁㅁㅁㅁㅁ

 

<정습명 묘지명(1150)>

 

정습명 묘지명을 검토한 결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의를 확인하였다. 먼저, 그의 출생 연도를 알 수 있었다. 두 번째로, 그의 부모, 처가 모두 鄭氏임을 알 수 있어, 당시 향촌 호장층이 동성혼을 통해 그 족적유대를 유지해간 관행을 알 수 있고, 이로써 항공 출신의 기반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 번째로 향공시, 성균시, 최종 급제시의 나이를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향공 출신 정습명의 정치 행로, 葬禮過程, 卒年이 『高麗史』와 1년 차이가 나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정습명은 헌종 1년(1094)에 영일현 부호장 鄭候鑑을 아버지로 같은 성씨를 어머니로 하여 출생하였다. 그의 관력과 정치 행보에서 중요한 것은 인종 14년 묘청난을 진압하는 데에서부터 동왕 23년 『三國史記』 편찬에까지 金富軾과 행보를 같이 한 점이다. 의종 즉위 후에는 인종의 顧託 신하로서 적극 국정에 참여하였으나, 동왕 5년에 왕의 측근인 정치구도에서 배제되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였다.
정습명은 김부식과 같은 지연으로, 부식의 형 부일의 문생으로서 김부식과 정치 행보를 같이하였다. 나아가 그는 公禮를 바탕한 국왕권 중심의 국가 질서를 강조한 김부식의 정치 이념도 함께하였다. 이는 『동문선』에 남은 그의 표전문에서도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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