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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래기(葬)

*[論&論]귄터.그라스 - <양철북>에서의 죽음의 모티브

by fireball'Flee 2022. 7. 25.

2006. 12. 18.
[참고문헌 : Zusammenfassung]

 

 

 

*귄터.그라스,<양철북>에서의 죽음의 모티브*
---------- by, 은정윤 ----------

 

 

 

-目 次-
1. 들어가는 말
2. '양철북'에 나타난 죽음
3. 오스카 마체라트의 죽음에 대한 동경
4. 죽음의 모티브의 의미

5.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1959년에 출간된 귄터 그라스 G nter Grass의 소설 {양철북 Die Blech- trommel}은 전후 문학의 한 대표적인 예로서 죽음의 모티브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사적 상황의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종말은 파시즘의 진압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지금까지의 방법으로 정돈될 수 있다는 희망의 종식을 가져왔다.
Das Ende des zweiten Weltkrieges brachte nicht nur die Niederwerfung des Faschismus, sondern auch das Ende der Hoffnung, da die Welt in bisheriger Weise zu ordnen sei.

1945년 8월 6일에 일본의 히로시마에 투하된 첫 번째의 원자탄은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었지만, 양대 강국인 미국과 소련 사이의 강권 정치적, 이념적인 논쟁은 인류에게 끊임없는 위협으로 작용했다. 커져가는 동서 갈등, 즉 소위말하는 "냉전"은 핵전쟁을 통한 세계 종말의 가능성을 강화시켰다.
"집단적 재앙"에 대한 전망은 극단적으로 발전해가는 기술, 관료화 그리고 총체적인 정치체계의 제한되지 않은 힘과 일치되고 있다.
여기서 간략하게 스케치한 세계사적인 상황은 죽음의 모티브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전후 문학에 관련지어서, 전체 존재가 의미 없는 것 내지는 불합리한 것인지, 그리고 "죽음은 단지 불합리성의 마지막 증명서인지 der Tod nur der letzte Ausweis des Absurden sei"하는 의문에 대한 계기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양철북}에 나타난 죽음도 그 근거를 물어보아야 한다. {양철북}에 묘사된 죽음은 실로 다양하다.
본 논문은 {양철북}에 나타난 죽음의 특성을 살펴봄으로써, 죽음의 모티브가 전체 작품의 해석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먼저 밝혀보고자 한다. 그 다음에 이 소설 속에서 죽음의 모티브가 차지하는 비중에서 출발하여 작가 그라스에게 어떤 추론을 할 수 있는지, 다시 말해서 죽음과 글쓰기 사이의 관계를 알아보려고 한다.


2. {양철북}에 나타난 죽음
 

 

 
1937년에 오스카 마체라트 Oskar Matzerath의 어머니 아그네스 마체라트 Agnes Matzerath는 포식하고 황달과 생선중독으로 인하여 죽게 된다. 그녀의 죽음은 오히려 자살처럼 작용한다. 왜냐하면 죽음이 그녀에게는 얀 브론스키 Jan Bronski와 알프레트 마체라트 Alfred Matzerath에 대한 삼각관계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한 오스카의 반응은 슬픔도 아니고 놀라움도 아니다. 마치 그가 그녀의 죽음을 예상하기라도 했던 것 같다

실제로 불쌍한 내 어머니의 죽음은 나를 거의 놀라게 하지 않았다. 오스카에게는 마치 그녀가 벌써 수년 전부터 삼각관계를 청산하는 하나의 가능성을 애써서 찾고 있는 것같이 생각되지 않았던가.
Auch berraschte mich der Tod meiner armen Mama kaum. War es Oskar, (...), nicht vorgekommen, als suche sie schon seit Jahren angestrengt nach einer M glichkeit, das Dreieckverh ltnis dergestalt aufzul sen, (...). (S. 192)

오스카의 친구인 헤르베르트 트룩찐스키 Herbert Truczinski는 박물관 경비로 일하는 동안에 목각 인물과 교미하려고 시도하다 죽는다. 화자인 오스카는 이러한 불합리한 죽음을 지극히 냉담하게 해설하고 있다. 여기서도 오스카는 역시 놀라지 않고 마치 친구의 죽음을 대비하고 있었던 것같은 인상을 준다:

내가 헤르베르트를 보았을 때, 웃지 않았다는 사실! 그는 앞쪽에서 니오베에게 매달려 목각과 교미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 이 정욕에 눈이 먼 사나이는 양쪽에 날이 선 짧은 선원용의 도끼를 안전 고리사슬로부터 잡아 빼내어, 한쪽 날은 니오베 나무 속에 박고, 또 한쪽 날은 여인을 정복하려 발버둥치다가 자신의 살 속에 쑤셔 박은 것이다.
Da ich nicht lachte, als ich Herbert sah! Er hing der Niobe vorne drauf, hatte das Holz bespringen wollen. (...) Ein kurzes, auf beiden Seiten gesch rftes Schiffsbeil hatte sich der Br nstige von der Sicherheitskette gerissen, die eine Schneide der Niobe ins Holz geschlagen, den anderen Keil sich selbst, das Weib erst rmend, ins Fleisch gesto en. (S. 234)

오스카의 어머니의 연인이자 그의 추정상의 아버지인 얀 브론스키는 폴란드 우체국을 방어한 후에, 불법 군사 활동 죄로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처형된다. 이 죽음도 또한 오스카한테는 끔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죽음을 회상하면서 오스카는 이렇게 적고 있다:

얀이 이미 카드로 세운 집의 영원한 나라로 가서 그러한 행운을 믿는 집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동안에, (...). W hrend sich Jan schon im ewigen Reich der Kartenh user befand und gl cklich solch ein dem Gl ck gl ubiges Haus bewohnte, (...). (S. 299)

그 밖에도 오스카는 "카드로 된 집이 유일하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숙소라는 믿음이 그 자신에게도 역시 낯설지 않다는 da auch ihm selber (...) - der Glaube an Kartenh user als einzig menschenw rdige Behausung nicht fremd war"(S. 299) 사실을 강조한다.

기계를 만지는데 재능이 있는 채소장수 그레프 Greff는, 북 장치를 조립하여 만든 저울 위에 그 자신의 몸무게와 같은 75kg의 감자를 올려 놓고 목을 매달아 죽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죽는 것도 역시 오스카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껴진다:

그레프의 모습도 내게는 정상적으로 보이게 되었다. 왜냐하면 근본에 있어서 목을 매단 사내의 자세는 이를테면 물구나무를 서서 걷고 있는 사내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정상이고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Greffs Anblick normalisierte sich mir; denn im Grunde ist die K rperstellung eines h ngenden Mannes genauso normal und nat rlich wie etwa der Anblick eines Mannes, der auf den H nden l uft, (...). (S. 386)

심지어 오스카는 이런 진기한 방식으로 자살을 감행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42년 10월에 채소장수 그레프가 그토록 완벽한 형태의 교수대에서 목매어 죽어서, 그 이후부터 나 오스카는 자살을 숭고한 죽음의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Im Oktober zweiundvierzig erh ngte sich der Gem seh ndler Greff an einem so formvollendeten Galgen, da ich, Oskar, fortan den Selbstmord zu den erhabenen Todesarten z hlte. (S. 390)

죽음이란 오스카에게는 자연 현상 Naturereignis에 상응한다는 사실을, 그의 추정상의 아버지인 마체라트의 죽음에 대한 묘사가 특히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체라트가 집의 지하실에 쳐들어온 러시아인들을 맞아 오스카가 핀이 열린 채로 그의 손에 쥐어 주었던 당 배지를 삼키고 미처 질식하여 죽기 전에 그들이 쏜 총에 맞아 죽는 동안에도, 오스카는 단지 개미 거리만을 주목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보고하고 있다:

운명이 들이닥친다면 누가 그 모든 것을 하지 않겠는가! 나의 추정상의 아버지가 당을 꿀컥 삼키고 죽는 동안에, 나는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거나 알아채려 하지 않고, 내가 조금 전에 칼뮉인에게서 잡았던 이를 손가락 사이에서 눌러 죽였다. 마체라트는 개미의 거리를 가로질러 넘어져 있었다.
(...) 개미들은 변화된 상황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돌아가는 길을 마다하지 않고 구부러져 쓰러져 있는 마체라트 주위를 우회해서 그들의 군용도로를 쌓고 있었다. Was man nicht alles tut, wenn das Schicksal seinen Auftritt hat! W hrend mein mutma licher Vater die Partei verschluckte und starb, zerdr ckte ich, ohne es zu merken oder zu wollen, zwischen den Fingern eine Laus, die ich dem Kalm cken kurz zuvor abgefangen hatte. Matzerath hatte sich quer ber die Ameisenstra e fallen lassen. (...).
Die Ameisen fanden eine ver nderte Situation vor, scheuten aber den Umweg nicht, bauten ihre Heerstra e um den gekr mmten Matzerath herum; (...). (S. 485 f.)

지금까지 살펴본 죽음에 대한 묘사에서 분명해지고 있듯이, {양철북}에서는 삶도 죽음도 하나의 자연 현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삶은 죽음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고, 죽음은 모든 삶의 필연적인 결말을 이루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융 C.G. Jung은 삶과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탄환의 탄도가 목표에 도달해서 끝나고 있듯이, 삶은 전 인생의 목표인 죽음에서 끝이 난다. 인생의 상승과 정점조차도 단지 목표, 즉 죽음에 당도하려는 목적에 대한 단계와 수단일 뿐이다.
Wie die Flugbahn des geschosses im Ziel, so endet das Leben im Tod, der mithin das Ziel des ganzen Lebens ist. Selbst dessen Aufstieg und sein H hepunkt sind nur Stufen und Mittel zum Zwecke, das Ziel, n mlich den Tod, zu erreichen.

탄생과 죽음은 {양철북}에서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중간에 역시 모든 다른 자연적인 사건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 삶이 놓여 있다:

생성과 소멸은 같은 곡선이다.
Werden und Vergehen ist dieselbe Kurve.

지금까지 살펴본 죽음들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그 밖에도 여기서 언급된 사람들 모두 그들 자신의 "고유한 eigen" 죽음을 죽는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그의 능력을 전적으로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는데 국한시키고 있는 정열적인 요리사로서의 마체라트는, 러시아인들 앞에서 오스카가 그의 손에 쥐어 주었던 당 배지를 숨길 장소로 그의 목구멍 이외에는 달리 찾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음식은 마체라트에게나 그의 부인 아그네스에게나 그들의 생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마침내는 그들의 삶에 상응하는 죽음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아그네스 마체라트한테서 특징적인 것도 마찬가지로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인데, 이것은 상징적으로 그녀의 열정을 의미한다. 맛있는 사랑의 음식들을 얀 브론스키와 아그네스 마체라트는 봐이츠케 카페에서 먹는다. 오스카는 그들의 강렬한 식욕을 이렇게 묘사한다:

엄마와 얀 브론스키는 부스러기를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먹어 치웠다. 그들은 결코 그치지 않고 스스로 제 꼬리를 물고 있는 엄청난 식욕을 갖고 있었다.
Mama und Jan Bronski lie en kein Kr melchen brig. Die a en alles selbst auf.
Die hatten den gro en Appetit, der nie aufh rt, der sich selbst in den Schwanz bei t. (S. 116)

"결코 그치지 않고 스스로 제 꼬리를 물고 있는 엄청난 식욕"이란 메타포는 벌써 탐욕스런 어머니의 종말을 암시하고 있다. 성 금요일의 산책과 함께 그녀의 본래의 고난의 길이 시작될 때까지 아그네스는 점점 더 운명적으로 자신의 열정 속으로 얽혀 들어간다.
이 때 그녀는 "그녀의 강렬한 식욕의 본질을 구체적인 형태 속에서 das Wesen ihres Hei hungers in konkreter Form" 바라본다. 즉 그녀는 말대가리 속을 꽉 물고 있는 뱀장어들을 보게 된다.

말대가리는 지금까지 단지 "몰래" 먹었던 그녀로 하여금 그녀의 식욕을 뚜렷이 과시하도록 강요한다. 음식과 자기 자신, 먹는자와 먹히는 자에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그녀 자신은 음식과 더불어 먹힌다.
Der Pferdekopf zwingt sie, die bisher nur `heimlich" (...) a , ihre Esserei eindeutig vorzuf hren. Mit dem Essen wird sie selbst gegessen, um dem Essen und sich selbst, der Esserin und der Gegessenen, ein Ende zu bereiten.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아그네스는 그녀의 인간됨에 "전형적인 typisch" 죽음을 죽는다. 왜냐하면 그녀의 정열은 구체적으로 맛있는 음식들과 생선들을 삼키는데 얽매여 있고, 그리고 그러면서 포식하기 때문이다.
페르구존 L. Ferguson이 아그네스의 죽음을 적확하게 요약하고 있다:

주의깊은 관찰자의 눈 앞에는 어머니의 신체적인 해체와 함께 "결코 그치지 않고 스스로 제 꼬리를 물고 있는 엄청난 식욕"의 광경이 실현되고 있다.
Vor den Augen der aufmerksamen Beobachter verwirklicht sich mit der k rperlichen Aufl sung der Mutter das Schauspiel des `gro en Appetits, der nie aufh rt, der sich selbst in den Schwanz bei t".

삶과 죽음이 {양철북}에서는 매번 얼마나 서로 일치되고 있는가를, 채소장수 그레프의 비인습적인 자살이 특히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채소장수는 그에게 적합한 죽음의 형태를 찾았고 균형잡힌 죽음을 알아냈다. 그는 생전에 도량형 검정국의 관리들과 어려움을 가졌고 불쾌한 편지를 주고 받았다. 즉 그들은 몇 번이나 그의 저울과 추를 차압했고, 과일과 야채의 계량이 부정확하다고 해서 그에게 벌금을 물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몸과 감자를 1그램도 틀리지 않게 균형을 잡아 보인 것이다.

Der Gem seh ndler hatte eine ihm angemessene Form des Todes gesucht, hatte einen ausgewogenen Tod gefunden.
Er, der Zeit seines Lebens mit den Beamten des Eichamtes Schwierigkeiten und peinlichen Briefwechsel gehabt hatte, er, dem sie die Waage und die Gewichte mehrmals beschlagnahmt hatten, er, der wegen unkorrekten Abwiegens von Obst und Gem se Bu en hatte zahlen m ssen, er wog sich aufs Gramm mit Kartoffeln auf. (S. 387)

끝으로 강조되어야 할 점은, 여기서 거론된 사람들의 삶 속에서 드러난 서로 다른 열정과 허약함은 바로 죽음의 방식을 통해 다시 한 번 강화된다는 사실이다.
즉 {양철북}에 나타난 죽음의 두드러진 특성은, 한편으로는 해당되는 사람들이 그들의 "가장 고유한" 죽음을 죽는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이 자연 현상에 상응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3. 오스카 마체라트의 죽음에 대한 동경

 
 

오스카 마체라트의 죽음에 대한 동경 그의 탄생 시점부터 오스카는 생에 대한 거리를 구축하는데 이 거리는 그의 상징적인 죽음, 즉 정신 병원의 침대 속에서의 편안한 상태로까지 지속된다.
벌써 소설의 맨 첫 페이지에 침대는 그의 생의 목표로 기입되어 있다:

내 침대는 마침내 도달한 목적지이다. 나의 위안은 그 침대이고, 만약 병원 당국이 약간 고치는 것을 내게 허락한다면 내 신앙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내게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침대의 격자를 높게 하라고 하고 싶다.
(...): mein Bett ist das endlich erreichte Ziel, mein Trost ist es und k nnte mein Glaube werden, wenn mir die Anstaltsleitung erlaubte, einige nderungen vorzunehmen: das Bettgitter m chte ich erh hen lassen, damit mir niemand mehr zu nahe tritt. (S. 6)

오스카의 가치 체계는 여기서 아주 분명해진다. 세상에의 참여는 가치가 없기 때문에 격자 침대는 그를 외부 세계로부터 차단시키는 그의 "마침내 도달한 목적지"이고, 정신 병원 밖에 있는 사람들은 세상을 향해 단순히 "혼란스런"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정신 병원 밖에서 혼란스런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모두에게 (...).
Ihnen allen, die Sie au erhalb meiner Heil- und Pflegeanstalt ein verworrenes Leben f hren m ssen, (...). (S. 9)

벌써 그의 탄생 장면에서 오스카의 삶에 대한 증오,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그의 소원이 명료하게 나타나고 있다:

(...) ; 그리고 단지 약속된 양철북만이 그 당시 내가 태아의 머리위치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망을 보다 강하게 표현하려는 나를 방해했다. 특히 산파가 벌써 나의 탯줄을 잘라 버렸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 und nur die in Aussicht gestellte Blechtrommel hinderte mich damals, dem Wunsch nach R ckkehr in meine embryonale Kopflage st rkeren Ausdruck zu geben. Zudem hatte die Hebamme mich schon abgenabelt; es war nichts mehr zu machen. (S. 49)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라는 말은, 자신이 고독하고 무의미한 인생 속에 구원될 수 없이 내던져져 있음을 통찰하고 있는 오스카의 체념적인 인식을 표현하고 있다.
즉 그는 애초부터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후에 오스카는 자신의 세 살의 생일날에 지하실에서 추락하여 의도적으로 성장을 중지하면서, 세상 일에의 모든 참여를 거부한다.
벌써 탄생시에 있었던, 탄생 전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오스카의 열망은 우선 할머니의 치마 모티브에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오늘까지도 나는 자꾸만 나 자신이 그토록 따뜻하게 구워진 벽돌이 되어 할머니 치마 밑에 누워 있을 수 있기를 소원한다.
(...) 내가 할머니의 치마 속에서보다 더 편안하게 달력대로 살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Noch heute w nsche ich mir, als solch backwarmer Ziegelstein unter den R cken meiner Gro mutter, immer wieder gegen mich selbst ausgetauscht, liegen zu d rfen. (...) Nirgendwo konnte ich ruhiger nach dem Kalender leben als unter den R cken meiner Gro mutter. (S. 147 f.)

할머니의 넓은 치마 속에서 예전에 방화자 요젭 콜야이쩩 Joseph Koljaiczek이 그의 추적자들을 피해 도피처를 찾았고, 그로 인해 오스카의 어머니 아그네스가 태어났다. 할머니의 흙빛의 옷색은 그녀가 "대지에 매여 있음과 정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할머니의 옷은 "숨겨주는 것과 보호하는 것"의 총체이므로 피난처의 성격 뿐만 아니라, 감자 경작지 위에서의 생식 행위는 또한 분명한 성행위의 성격을 갖는다. 네 겹으로 된 폭 넓은 치마 속에서의 생식 과정은 안나 콜야이쩩 Anna Koljaiczek의 상징적인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 그녀는 생산자이고, 보살펴 주는 보호자이고, 무엇보다도 오스카에게는 상실돼 버린 낙원에 대한 메타포이다:

오스카한테 있어서 낙원은 할머니의 모습 속에서 구체적인 등가를 찾아내게 되었다. Das Paradies hat f r Oskar in der Gestalt der Gro mutter sein konkretes quivalent gefunden.

할머니의 폭 넓은 치마 밑에서 도피처를 찾고자 하는 생각이 오스카한테는 영원한 소원 Wunschvorstellung으로 된다:

이 치마 밑으로의 귀환이 얘기가 되어질 때면 언제나 결코 태어나지 않으려는 소망, 태어나지 않은 상태의 영속적인 어두움 속에서 실체가 없는 삶을 영위하려는 소망이 함께 의미되어 있다.
Immer, wenn von der R ckkehr unter diese R cke gesprochen wird, dann ist der Wunsch mitgemeint, nie geboren zu sein, ein gestaltloses Leben im immerw hrenden Dunkel des Ungeborenseins zu f hren.

치마 모티브에 대한 구절을 텍스트에서 더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항상 같은 기본 모티브라는 사실, 즉 삶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려는 소원이라는 사실이 확인될 수 있다. 할머니의 품안은 근원일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것의 목표이다. 할머니의 품 속은 죽음과 성 사이의 연결을 만들어 낸다. 오스카는 탄생 전의 상태를, 결국엔 죽음의 상태를 동경한다. 플란쯔 E. Pflanz는 오스카의 삶의 목표는 "심리 분석 이론의 열반 Nirwana der psychoanalytischen Theorie"이라고 주장한다.
탯줄로의 귀환에 대한 동경은, 치마 모티브 외에 또한 옷장, 침대, 관, 무덤 등과 같은 모티브들을 함께 연관시키는 주도 모티브 체계 Leitmotivsystem를 통해 정착된다. 오스카의 열광을 통해 그 의미가 눈에 띄게 되는 관의 모티브는 그의 어머니 아그네스가 죽은 후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반쯤 시골 기분이 나는 브렌타우 묘지에서 관의 모양이 처음으로 내 마음에 들었다.
(...) 나의 불쌍한 어머니의 관은 검정색이었다. 그 관은 놀랍게 조화가 이루어져 발끝 쪽으로 갈수록 좁아졌다. 이 세상에 인체의 비율과 이렇게 유사하게 잘 조화된 형태가 있을까?

Auf dem halbl ndlichen Friedhof Brenntau (...), gefiel mir zum erstenmal die Form des Sarges. (...) Der Sarg meiner armen Mama war schwarz. Er verj ngte sich auf wunderbar harmonische Weise zum Fu ende hin. Gibt es auf dieser Welt eine Form, die den Proportionen den Menschen auf hnlich gelungene Art entspricht? (S. 195 f.)

오스카는 관의 모양에 아주 매혹되어서 그 모양을 그의 침대에 주고 싶을 정도이다:
침대도 이와 같이 발끝 쪽으로 갈수록 좁게 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 그 이유는 우리들이 아무리 거드름을 뺀다고 해도, 머리와 어깨와 몸통에 대해 넓은 면적을 필요로 하고 있는 우리의 발에 알맞는 것은 결국은 단지 이 좁은 토대 뿐이기 때문에, 그건 발끝 쪽으로 올수록 좁아도 되는 것이다.
H tten die Betten doch diesen Schwund zum Fu ende hin! (...) Denn, m gen wir uns noch so spreizen, endlich ist es doch nur diese schmale Basis, die unseren F en zukommt, die sich vom breiten Aufwand, den Kopf, Schultern und Rumpf beanspruchen, zum Fu ende hin verj ngt. (S. 196)

위 인용문은 오스카의 생각 속에는 정신 병원의 침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죽음과 비슷한 상태에 가까워 오고 있다는 가정을 확인하고 있다.
오스카의 죽음에 대한 열망은 무엇보다도 그의 어머니의 매장시에 확인되어질 수 있다. 그녀의 관이 무덤으로 옮겨질 때 오스카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는다:

오스카는 관 위에 올라타고 싶었다. 그 위에 앉아서 북을 치고 싶었다. 오스카는 북채로 양철이 아니라 관 뚜껑을 두들기고 싶었다.
(...) 엄마와 태아와 함께 오스카는 무덤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유족들이 손에 잔뜩 쥔 흙덩어리를 던지는 동안 오스카는 밑에 머물러 올라오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 좁아진 발끝 쪽에 앉아서 북을 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흙 속에서 북을 치고 싶었다.
(...): auf den Sarg wollte Oskar hinauf. Obendraufsitzen wollte er und trommeln. Nicht aufs Blech, auf den Sargdeckel wollte Oskar mit seinem St cken.(...) Mit Mama und dem Embryo wollte Oskar in die Grube. Unten bleiben, w hrend die Hinterbliebenen ihre Hand voller Erde hinabwarfen, nicht hochkommen wollte Oskar, auf dem verj ngten Fu ende wollte er sitzen, trommeln, wenn m glich unter der Erde trommeln, (...). (S. 196 f.)

어머니의 무덤 속에서 북을 치고 싶어하는 오스카의 생각 속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어두운 공간 속에 머무르고자 하는 오스카의 생각은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가려는 소원을 대체하고 있다:

오스카가 치마 밑에 머무르려 하고 결국엔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을 대체할 수 있는 일련의 내부 공간들은, 서로 다른 특징을 강조하면서 치마 모티브의 구성 요소들을 명료하게 한다.
Die Reihe der Innenr ume, die Oskar den Aufenthalt unter den R cken und letztendlich die R ckkehr in den m tterlichen Scho ersetzen k nnen, verdeutlicht die Komponenten des Rockmotivs in unterschiedlicher Akzentuierung.

따라서 침대, 옷장, 관, 무덤 등과 같은 일련의 어두운 공간들은 단지 치마 모티브의 한 변형일 뿐이고, 동시에 오스카의 죽음에 대한 염원을 함축하고 있다.
오스카의 죽음에 대한 동경과 관련지어서 괴테 Goethe의 소설 {친화력 Die Wahlverwandtschaften}(1809)에서의 죽음의 모티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틸리에 Ottilie의 죽음에 대한 동경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오스카는 빵집 여자 그레트헨 셰플러 Gretchen Scheffler의 집에서 그녀의 책 중에서 {라스푸틴과 여인들 Rasputin und die Frauen}이란 부제를 가진 퓔룁-밀러 R. F l p-Miller의 {성스러운 악마 Der heilige Teufel}(1927)와 괴테의 {친화력}을 골라 잡는다. 이 두 책은 오스카의 죽음에 대한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양철북}에 나타난 죽음의 모티브의 해석 내지는 작가 귄터 그라스의 입장을 밝히는 데도 결정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을 쥐었다고 하는 사실이 나의 인생에, 적어도 내 북에서 멀어져서 살고 있는 체하는 그런 삶에 의무를 지우고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Dieser Doppelgriff sollte mein Leben, zumindest jenes Leben, welches abseits meiner Trommel zu f hren ich mir anma te, festlegen und beeinflussen. (S. 102)

오스카는 문화사가이자 문학사가인 퓔룁-밀러의 라스푸틴 전기의 도움으로 ABC를 배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위 세계를 파악하는 행동 유형도 또한 그 책 속에서 도출하게 된다.
오스카가 읽은 라스푸틴의 이야기는 본 논문에서 살펴보고 있는 {양철북}에 나타난 죽음의 테마와 관련지어 매우 흥미가 있다. 그 이유는 러시아의 승려이자 마법사인 라스푸틴의 끔찍한 죽음도, {양철북}에서와 마찬가지로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그의 음식에 대한 지나친 열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라스푸틴의 죽음은 내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독이 든 케이크와 독이 든 포도주로 독살되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케이크를 좀 더 달라고 했을 때 피스톨로 사살되었다. 그리고 가슴 속의 납이 그를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으로 만들었을 때, 묶여서 네바 강의 얼음 구멍 속에 던져졌다.
Rasputins Tod ging mir nach: Man hat ihn mit vergifteter Torte, vergiftetem Wein vergiftet, dann, als er mehr von der Torte wollte, mit Pistolen erschossen, und als ihn das Blei in der Brust tanzlustig stimmte, gefesselt und in einem Eisloch der Newa versenkt. (S. 104)

{양철북}과 괴테의 {친화력}에서의 죽음의 모티브 사이의 연관관계는 보다 상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오스카는 괴테를 "시성 Dichterf rsten"(S. 102)이라고 칭한다.
오스카한테 있어서 괴테는 그 자체로서 "질서", "자연법칙"을 대변하고 있고 그럼으로써 "라스푸틴의 도취적이고 혼란스런 것과는 대조에 im Kontrast zum Rauschhaften, Chaotischen eines Rasputin" 놓이게 된다.
괴테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자연지향적인 사고가 두드러진다.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나온 그의 작품의 제목이 벌써 시사하고 있듯이, 괴테의 {친화력}에서는 인간은 전적으로 자연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즉 소설의 네 명의 주인공들에게는 윤리적인 결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도덕적 법칙에 복종하려는 그들의 모든 시도는 허사이다.
이러한 사상은 또한 그라스한테서도 발견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양철북}에 나타난 죽음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양철북}에서는 모든 인간의 행동은 자연의 행동으로, 모든 사건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역시 자연 현상으로 이해된다.
오스카가 끊임없이 탄생 전의 상태를 열망하고 있듯이, 괴테의 오틸리에도 역시 죽음에 대한 동경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둘 다 스스로를 항상 같은 것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속수무책으로 수습할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틸리에는 자신의 일기 속에서 죽음에 대한 그녀의 입장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인생에 대해 한 번 폭 넓게 생각해 본다면,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장차 쉬게 되는 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기분 좋은 생각이다.
(...) 많은 가라앉아 있는, 교회에 다니는 신도들로 인해 밟혀서 닳게 된 묘석들을 바라볼 때면, 우리에게는 죽음 후의 삶이 항상 제 이의 삶처럼 여겨지는데, 그 삶 속에 우리가 이제 들어가서 본래 살고 있는 삶보다 더 오래 머무를 것처럼 생각된다.
Neben denen dereinst zu ruhen, die man liebt, ist die angenehmste Vorstellung, welche der Mensch haben kann, wenn er einmal ber das Leben hinausdenkt. (...) Wenn man die vielen versunkenen, die durch Kirchg nger abgetretenen Grabsteine (...) erblickt, so kann einem das Leben nach dem Tode doch immer wie ein zweites Leben vorkommen, in das man nun (...) eintritt und l nger darin verweilt als in dem eigentlichen lebendigen Leben.

오틸리에한테는 이 세상에 적응하여 사는 것이 점점 더 회의적으로 느껴진다.
현세에서의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인식한 오틸리에는 모든 것을 제쳐놓고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 오틸리에의 삶에 대한 두려움은 그녀의 생의 거부로 이어지는데, 오틸리에는 점점 적게 먹으면서 마침내 굶어 죽는다.
일련의 괴테-라스푸틴-암시의 자세한 고찰은, 오스카가 그런 책을 일찍이 읽었다는 사실이 죽음에 대한 그의 관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그들의 생에 대한 거부에 관련지어 오스카와 오틸리에 사이의 유사성이다.


4. 죽음의 모티브의 의미


그의 탄생 장면이 분명히 하고 있듯이, 오스카 마체라트는 벌써 탄생시부터 삶에 대한 극심한 증오에 사로잡혀 있고, 끊임없이 탄생 전의 편안한 상태로 돌아가기를 염원하고 있다. 따라서 정신 병원의 침대는 오스카가 "마침내 도달한 목적지"이고, 그의 가장 큰 걱정은 그가 정신 병원에서 퇴원하게 되어 자신의 아끼는 침대를 뺏기게 되는 일이다:

내가 수년 전부터 나의 도주 이래로 두려워했던 것이 오늘 30살이 되는 생일 날에 예고된다: 진짜 죄지은 자를 찾아내고, 재판을 다시 속개하고, 나를 무죄 판결하고, 나를 정신 병원에서 석방하고, 내게서 나의 아끼는 침대를 앗아가고, 나를 차갑고 온갖 악천후에 내맡겨진 거리에 세워둘 것이다.
Was ich seit Jahren bef rchte, seit meiner Flucht bef rchte, k ndigt sich heute an meinem drei igsten Geburtstag an: man findet den wahren Schuldigen, rollt den Proze wieder auf, spricht mich frei, entl t mich aus der Heil- und Pflegeanstalt, nimmt mir mein s es Bett, stellt mich auf die kalte, allen Wettern ausgesetzte Stra e (...). (S. 718)

유스트 G. Just는 오스카가 거듭거듭 표현하고 있는 그의 침대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오스카가 마침내 도달한 목적지, 즉 정신 병원의 침대는 독자에게도 또한 최고의 목적지라는 기분이 드는데, 그건 그로 인해 상징되어지는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인식과 같은 방식인 것이다.
Das endlich erreichte Ziel Oskars, das Anstaltsbett, wird auch dem Leser als h chstes Ziel zugemutet, in gleicher Weise, wie die dadurch sambolisierte Einsicht in die Sinnlosigkeit des Lebens.

{양철북}에 나타난 체념적인 자세와 인간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인식은, 뱀장어 에피소드 장면에서 특히 분명해진다. 그러한 광경을 바라볼 때 아그네스 마체라트는 그녀의 삼각관계와 연관지어 심한 구토를 일으키고, 자신의 위로받을 길 없는 삶을 의식하게 된다. 그녀의 죽음 앞에는 그녀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경험, 항상 같은 것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경험이 놓여 있다. 그녀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의 순환주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양철북} 소설 속에서 표현되고 있듯이, "뱀장어는 뱀장어로 되기 때문이다 denn Aal wird zu Aal"(S. 195).
이런 의미에서 고찰해 보면, 뱀장어는 특히 아그네스의 죽음과 그녀의 아버지의 죽음 사이의 연결을 만들어 낸다. 즉 인간의 시체를 먹는 뱀장어들은 바다 속에 익사하여 결코 다시 떠오르지 않는 아그네스 아버지의 시체를 먹는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이 뱀장어들은 인부에 의해 사로잡혀 소금 속에 절여져서 그의 딸 아그네스의 좋아하는 음식이 되고, 아그네스는 마침내 생선중독으로 인하여 죽게 된다:

지루한 장례식이 거행되는 동안에 나는 감정의 기복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어머니는 머리를 쳐들 것이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몸 속에는 아직도 남은 것이 있어서 밖으로 나오려 하고 있다. (...)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한 마리의 뱀장어에 대한 것이다. 몇 가닥의 담록색 힘줄이 보이는 뱀장어 살, 스카게락 해전의 뱀장어, 노이파르바써 방파제의 뱀장어, 성 금요일의 뱀장어, 말대가리에서 튀어나온 뱀장어, 어쩌면 뗏목 밑에 끼어들어 뱀장어의 밥이 되었을 그녀의 아버지 요젭 콜야이쩩에게서 나온 뱀장어, 당신의 뱀장어의 뱀장어, 왜냐하면 뱀장어는 뱀장어로 되는 거니까...

Ich konnte w hrend der umst ndlichen Zeremonien das Gef hl nicht loswerden: Gleich wird es ihr den Kopf hochrei en, sie wird sich noch einmal bergeben m ssen, sie hat noch etwas im Leib, das heraus will: (...), ein St ckchen Aal meine ich, einige wei gr nliche Fasern Aalfleisch, Aal von der Seeschlacht im Skagerrak, Aal von der Hafenmole Neufahrwasser, Karfreitagsaal, Aal aus dem Haupte des Rosses entsprungen, wom glich Aal aus ihrem Vater Joseph Koljaiczek, der unters Flo geriet und den Aalen anheimfiel, Aal von deinem Aal, denn Aal wird zu Aal... (S. 194 f.)

아그네스가 임신중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죽음, 삶, 죽음 그리고 삶 (...)의 끔직한 연속에 대한 어떤 것 etwas von der furchtbaren Kette von Tod, Leben, Tod und Leben (...)"을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이 자연에 묶여 있음 Naturgebundenheit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아이들의 공포의 대상인 마녀 "검은 요리사 Schwarze K chin"의 모티브 뒤에 숨겨져 있는 것과 동일한 생각이라 할 수 있으며, 그건 삶이 무의미하다는 일반적인 인식이다. 오스카는 비록 그의 목적지인 정신 병원의 침대에 도달해서 그의 평온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검은 요리사"의 환영에서 결코 해방되지 못한다. 거기서 생겨나오는 두려움과 절망은 오스카의 실존적인 기본 경험이다.

{양철북}을 "검은 요리사" 모티브가 주도적인 어두운 종말에서부터 해석한다면, 이 작품의 겉보기에 명백한 해석은 사회비판적으로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회비판이란 항상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사회와 변화될 수 있는 사회적 폐해를 겨냥하고 있다.
인생의 무의미성의 강조는 그에 반해 허무주의적 견해에 상응한다. 인간의 삶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으로써 역사적인 과정과 사회적인 사건들에 대한 비판은 무력하게 된다. 따라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것은 모두 의미가 없다. 이러한 견지에서 유스트가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역사와 무관하고 추상적인 세계관에 대한 시각이 펼쳐지는데, 그건 특히 19세기에 (그 시기의 현실적, 사회적 절망시에) 진보에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구상되어졌던 것처럼 "항상 같은 것의 되풀이"라는 허무주의적인 세계관과 일치한다.
(...), so ffnet sich die Perspektive auf eine ahistorische, abstrakte Weltanschauung, die sich in etwa deckt mit der nihilistischen der `Wiederkehr des Immergleichen", wie sie zumal im 19. Jahrhundert als Antwort auf den Fortschrittsglauben (bei gleichzeitiger realer gesell- schaftlicher Trostlosigkeit) konzipiert wurde.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기본 유형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기 때문에, 역사와 무관하게 이해된다. 죽음이 자연 현상 Naturereignis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역사 또한 {양철북}에서는 자연의 역사 Naturgeschichte로 간주된다.
이러한 사실을 소설의 주인공 오스카가 의심할 여지없이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살해될 때조차도 개미만 관찰하고 있는 오스카는, "시대의 사건 Zeitgeschehen"(S. 483)도 역시 개미들의 움직임을 관찰해 보고 그리고 그들의 근면성을 척도로 삼아서 평가한다. 오스카에게는 인간과 개미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쿠르트는 왜 어른들을 흉내내고 있었는지 내게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녀석은 자기 아버지인 나를 본보기로 삼고 따랐어야 할 게 아닌가 - 혹은 아버지가 아니라도 개미들을 본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Warum aber das Kurtchen die Erwachsenen nach ffte, blieb mir unerkl rlich. Der h tte sich ein Beispiel an mir, seinem Vater - oder wenn nicht am Vater, dann an den Ameisen nehmen sollen. (S. 483)

오스카 마체라트는 인간적 존재로 간주될 수 없다.
그는 이 소설에서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기준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자연적 존재 Naturwesen로 나타나고 있다.
현세의 삶은 가치가 없고 가장 좋기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오스카는, 죽음을 자신의 무의미한 인생을 제어하는 유일한 희망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소설의 끝에 가서는 "검은 요리사"의 모티브가 주도하면서 죽음조차도 오스카한테서 그 긍정적인 의미를 잃게된다.
"검은 요리사"는 죽음의 알레고리로서 오히려 북장이가 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불안의 환영과 공포를 불러 일으킨다. 끊임없이 죽음에 대한 동경에 사로잡혀 있던 오스카는 이제 그 자신의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게 되는데, 이 죽음을 "검은 요리사"가 알레고리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은 따라서 허무주의의 표현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양철북}의 일인칭 화자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계들을 회의를 가지고 고찰하며 이런 관계들의 해석에 끼어들지는 않는다.
슈나이더 I. Schneider에 따르면 이것은 소통의 거부로 이끈다:

과거를 갱신하고 그럼으로써 현재를 극복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근본적인 회의를 통해 소설 속에 나타나게 되는데, 그 회의의 한계는 소통의 거부 속에서 명료하게 된다.
Die Unm glichkeit der Aufarbeitung der Vergangenheit und damit der Bew ltigung der Gegenwart durch prinzipielle Skepsis wird im Roman angezeigt, indem die Grenzen der Skepsis in der Verweigerung der Kommunikation evident werden.

과거를 갱신하고 50년대에 존재한 세계사적인 상황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양철북}에서는 주인공 오스카의 회의를 통해 전달된다. 여기서 우리는 회의의 기본 자세와 관련지어, 작가 그라스와 그의 소설 속의 주인공 사이의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자서전적 소설인 {달팽이의 일기에서 Aus dem Tagebuch einer Schnecke}(1972)가 보여주고 있듯이, 귄터 그라스는 {양철북}의 오스카 마체라트와 비슷하게 회의적인 기본 자세를 통해 특징지어진다:
나에 대해서, 그래 좋다. 나는 어떤 상을 제시하지는 않겠다. 온갖 다른 꽃들보다도 내게는 밝은 잿빛의, 일년 내내 꽃이 피고 있는 회의가 맘에 든다.
Also gut: ber mich. Ich gebe kein Bild ab. Vor allen anderen Blumen gef llt mir die hellgraue, das ganze Jahr ber bl hende Skepsis.

죽음의 모티브란 테마로 본 논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스카는 끊임없이 죽음에 대한 동경에 사로잡혀 있다.
즉 그는 탄생 전의 어머니의 몸 속에서와 같은 상태인 그의 "태아기의 머리위치 embryonale Kopflage"로 돌아가기를 열망하고 있다. 작가 그라스 또한 그의 소설의 인물 오스카와 비슷한 동경에 사로잡히는 것 같다:

많은 것을, 즉 나의 구멍들을 나는 비밀로 한다. 이따금 나는 홀로 기진맥진해 있으며, 부드럽고 따뜻하고 축축한 그 어떤 곳 속으로 기어들어 가고 싶어 한다.
그 곳은 내가 여성적이라고 명명하려 한다면 불충분한 명칭일 것이다. 얼마나 내가 피난처를 찾으며 지쳐 있는지.
Manches verschweige ich: meine L cher. Manchmal bin ich fertig allein und m chte in etwas weich warm Feuchtes kriechen, das unzureichend bezeichnet w re, wenn ich es weiblich nennen wollte. Wie ich mich schutzsuchend ersch pfe.

위에 인용된 작가 자신의 심리적 상태에 대한 묘사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오스카와 마찬가지로 그라스도 역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안전하게 보호된 상태인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 즉 죽음에 대한 동경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 슈나이더 M. Schneider는 죽음과 글쓰기에 대한 관계를 보고 있다. 그는 죽음의 징후 속에서 작품의 생성에 대해 보고하는 다음과 같은 현대의 자서전적인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글쓰기에 대한) 현대적 인식은, 글쓰기란 삶과 그 삶의 세계를 정복하려는 본능의 독립적인 표현이 아니라, 삶의 욕구와 글을 쓰려는 욕구의 동맹 관계가 죽음을 매개로 하여 맺어지고 있음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Die moderne Erkenntnis, (...), f hrt uns vor Augen, da das Schreiben keine souver ne u erung des Lebens und seiner welterobernden Triebe ist, sondern da die Verbindung von Lebenswunsch und Schreibwunsch in der Agentur des Todes geschlossen wird.

5. 맺는 말
{양철북}은 시간상으로 보아 1899년부터 1953년까지, 즉 나치 시대 이전의 시기부터 전후 시대에 독일 연방공화국이 설립되는 시기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파시즘의 시기는 그라스의 작품 속에서 어두운 과거로 고찰되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에 현존하고 있는 50년대 시기의 문제로 활성화되어진다. 파쇼적인 이데올로기가 신랄하게 비난될 뿐만 아니라,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소설의 화자에게 공격의 평면을 제공하고 있다. 이 소설은 따라서 타협 없이 모든 것을 문제시하라는 독자에 대한 호소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전후의 새로운 세상에서 나치 과거를 청산하고 50년대에 존재한 세계사적인 상황을 극복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작가의 회의적 자세가, {양철북}에서는 주인공 오스카의 근본적인 회의를 통해 전달된다.
오스카는 이 소설 속에서 선과 악에 대한 의식도 없고, 보다 나은 가치 있는 삶을 향한 발전도 기대할 수 없는 자연적 존재 Naturwesen로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가까운 친지, 심지어는 그의 아버지가 살해되는 동안에도 조금도 슬퍼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오로지 개미만을 관찰하고 있고, 전쟁같은 시대적 사건도 역시 개미들의 움직임을 척도로 삼아 평가하고 있다.
{양철북}에서는 모든 죽음이 자연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인간의 역사도 역시 항상 같은 것이 되풀이되고 있는 무의미한 자연의 역사 Naturgeschichte로 간주되고 있다.

본 논문에서 살펴본 죽음의 모티브는 전체 작품의 해석을 위해서 중요하다.
{양철북}의 중심 인물인 오스카 마체라트는 삶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를 통해 특징지어진다. 오스카의 끊임없는 죽음에 대한 동경을 통해, 이 소설 속에서는 인간의 삶의 무의미함이 강조되어진다. 따라서 {양철북}은 "첨예한 사회비판적 의식하에 쓰여졌으면서도", 사회비판으로서의 온갖 해석은 무력하게 된다.
{양철북}에서 사회비판적인 시각을 보려 한다면, 김누리가 옳게 지적했듯이, "알레고리를 통해" 가능하게 된다.
소설의 끝에 가서는 죽음의 알레고리인 "검은 요리사"의 모티브가 주도하면서 죽음조차도 오스카한테서 그 긍정적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즉 끊임없이 죽음에 대한 동경에 사로잡혀 있던 오스카는, 아이들의 공포의 대상인 마녀 "검은 요리사"의 환영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서 마침내 그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 따라서 이 소설은 순전한 허무주의의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삶에 대한 회의와 관련지어 작가 그라스와 그의 소설 {양철북}의 주인공과의 유사성이 확인될 수 있다. 오스카와 마찬가지로 작가 그라스도 역시 탄생 전의 안전하게 보호된 상태인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 즉 죽음에 대한 동경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글쓰기란 그라스에겐 그의 죽음에 대한 충동, 인생에 대한 허무감을 극복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인식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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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neider, Irmela: Kritische Rezeption. `Die Blechtrommel" als Modell. Bern/ Frankfurt a.M. 1975.
Schneider, Manfred: Den Tod buchstabieren: Stottern - Zeitlupe - Schreiben. In: Akzente. 33. 1986. S. 443-451.
김누리:알레고리와 역사. {양철북}의 오스카르 마체라트의 시대사적 함의에 대하여. 실린 곳:독일문학. 65집. 1998년. 185-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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