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 10.
*우리나라의 상.장례 (2)*
-------------------------- [喪.葬禮의 歷史] --------------------------
- 장철수 저, "한국의 관혼상제중 상장례의 변천", 집문당 에서 발췌 -

------------------------------------------------------ 4. 고려시대 ------------------------------------------------------
고려시대의 고분은 구조상으로 석실묘, 석관묘, 토광묘로 나누어지는데 일반적으로 왕과 귀족들은 석실묘를, 귀족이나 상류층 인사들은 화장을 하여 석관묘를, 일반인들은 주로 토광묘를 쓴 것 같다. 그리고 당시에는 점차 관학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유교에 의한 상장례와 국교의 지위에 있었던 불교에 의한 화장이 함께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신라 말부터 성행되기 시작한 풍수지리설의 영향에 의하여 화장보다는 매장법이 유교식 상장례와 함께 널리 보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불교식 장례보다는 점차로 유교식의 조상숭배의례가 제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기는 흔히 고려 말 성리학이 들어오면서부터 강화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하나, 이미 광종 때의 과거시험이나, 11세기 초에 건립된 국자감 등을 통해서 보았을 때, 고려 초부터 유교식 조상숭배 사상에 의한 상장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고려시대의 상장례는 예부터 내려온 사자의례, 불교의례, 도교의례, 유교의례적 조상숭배가 각각 다양하게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점은 당시의 사회가 다양한 신앙형태를 인정하고 있는 점과도 밀접한 연관을 갖는 다고 하겠다.
석실묘는 몇기의 왕릉이 도굴됨에 따라 밝혀진 구조와, 위치로 보았을 때 다분히 풍수지리설에 따른 명당의 조건을 갖춘 곳에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내부는 다듬질한 장대석으로 네 벽을 쌓고, 판석 석 장으로 천장을 덮은 남북 장축의 방형석실이다. 벽과 천장은 모두 회칠을 하고 청색은 주색으로 성진도를 그렸으며, 벽화가 있다. 벽화 가운데에는 12지신상, 주악천녀, 무용도 등이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고구려, 낙랑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도교적 영향도 배제되지 않았다.
석곽묘는 수혈식으로, 다듬질한 화강석으로 3단으로 쌓아 벽을 만들고, 천장을 덮은 상자형 석곽으로서, 네 벽과 천장에 회칠을 한 다음 12지신상과 성신도를 그렸다. 앞의 석실묘와 같은 계통과 신앙적 배경을 가졌을 것으로 보이나 귀족 아니면 지방호족의 무덤일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전신장과는 달리 화장일 경우에는 뼈를 일정기간 동안 사찰에 모셨다가 장사지내는 이중장제로서, 그 관은 주로 넙적한 점판암으로 만들어졌던 것 같다. 이 석관의 바깥에는 4신, 또는 12지신상 등을 새기기도 하고, 지석을 새겨 함께 묻기도 하였다. 이것은 불교식 묘제로 석실묘 또는 석곽묘의 절충형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밖에 토광묘는 정남북을 장축으로 하여 목관을 넣은 것으로, 흔히 서민들의 무덤으로 알려지고있으나, 그것은 조선시대에 성행한 유교식토광묘와 같은 유형이라고 하겠다.
역사적 기록을 통해서 보았을 때, 고려 초기부터 3년상이 성행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켜, 이것을 단축한 예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것은 3년상의 달수를 날수로 고쳐, 경종 때에는 13일 소상을, 27일에 대상을 치르도록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성종 때에는 복제에 따라 휴가를 주는 제도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은, 유교식 상장례가 이미 고려초부터 있었음을 말해 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묘제에서는 중구그이 법제도를 따르고 있기도 한다. 따라서 묘의 크기에 있어서 제한 규정을 두고 있는 것으로, 경종 원년에 1품의 묘를 사방 90보로 하고, 차차품계에 따라 크기를 작게 하여 6품 이라는 30보까지 제한하고 있다.
고려의 상장제를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자료는 고려말의 기록에서 종종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여묘제(廬墓制)라고 하겠다. 이것은 오복제와 함께 유교적 상장례의 하나로 보여진다. 특히 3년간의 여묘는 의종 때부터 나타나는데, 《고려사》에 보이는 여묘는 의종 때 손응시, 명종 때의 장선부, 충선왕 때의 김광재, 우왕 때의 하운원, 정몽주 등에 의해서 행해진 것으로 되어 있으며, 국가에서 포상을 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바로 조상숭배 사상을 장려한 것으로, 본격적인 조상숭배에 근거한 상장제의 시행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주자가례가 실시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하겠다.
------------------------------------------------------ 5. 조선시대 ------------------------------------------------------
선사시대의 사자의례는 신라의 왕릉에서 공식적으로 끝나는 것으로 보이며, 낙랑과 고구려?백제의 석실묘제에 나타나는 중국 및 도교적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상장례는 고구려의 왕릉을 거쳐 조선시대의 왕릉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통일신라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불교적 화장법은 고려 말까지 매골ㆍ골장제에 의해서 지속되었던 것 같다. 한편 일찍부터 백제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했던 3년상은 고려시대까지 나타나다가, 한때 불교의 영향으로 100일, 또는 그 이내에 탈상을 하도록 하는 변화를 보이기도 했으나, 고려 말부터 다시 여묘제와 함께 강화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조상숭배에 의한 상장례의 길을 열고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주자의 《가례》의 의한 상장례가 고려 말에 수입되면서 조서시대의 대표적인 상장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조선시대의 정치적 이념을 성리학에서 찾고자 했던 지배계층의 노력의 결과라고 하겠다.
조선시대의 상장례를 종합한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왕릉의 구조는 석실분으로서, 고려의 왕릉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반면에 벽화로는 12지신상이 아니라 사신도가 발견되고 있다. 그러한 전통은 고구려와 낙랑의 고분벽화에서 나타나, 그대로 지배자의 상장제를 대표하는 것으로 살아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상장제의 절차는 송나라 때부터 확립되기 시작한 성리학의 의례체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성리학의 의례체제를 가장 잘 집약하고 있는 《가례》의 절차와 비교해 보면 거의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중국왕실의 것과의 비교에 의해서 밝혀질 것으로 보이나, 중국의 능묘제나 절차와도 상당히 유사할 것으로 추측된다.
《가례》의 상장례는 조상숭배의 사상을 최고도로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추원보본을 근본으로 하고있는 것이 유교의 상장제이기 때문이다. 그 절차에 의하면 죽음은 숨이 넘어가는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이어서 하늘로 올라간 영혼을 초혼하여 시신에 다시 실리는 절차를 밝교 있다. 그런 다음 영좌를 설치하여 혼백을 모시고, 이어서 명정도 마련한다. 매장한 다음에는 신주를 만들어, 죽은 조상의 영혼이 의지하고 있는 신체로 인식하고, 상청, 즉 궤연에 모신다. 3년상을 지낸 뒤에는 신주를 사당에 모시고 4대를 지날 때까지 모시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죽은 조상을 대신하는 신체로서, 혼백ㆍ명정ㆍ신주 등이 절차에 따라 시신을 대신해서 상장례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주자의 가례에서는 조상신으로 모셔, 특정한 시기마다, 즉 식사 때나 초하루나 보름, 그리고 명절 때마나 상식ㆍ삭망제ㆍ다례 들을 지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집안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살아 있는 어른에게 고하듯이 낱낱이 고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종교적 배경의 상장례와의 큰 차이는 이러한 정기적인 의례와 함께 조상신의 거처인 사당을 살아 있는 사람의 살림집과 같이 건립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 곳이 관례?혼례?상례나 제례와 같은 행사의 중심처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절차 외에도 흔히 ‘사자밥’이라고 하여, 죽은 혼을 저승으로 잘 데려가 달라는 뜻으로 저승사자에게 사자밥을 차려 주는 절차도 나타나고 있다. 그것도 사자가 3명이라고 인식하여 3그릇의 밥, 짚신 3켤레, 간장 3그릇과 함께 동전을 키나 상에 차려 대문 바께 놓는다. 이러한 절차는, 양반가문에서는 조상숭배식 상장례와 어긋난다고 하여 차리지 않는 곳도 있다. 이것은 불교식이나 사자의례의 흔적으로 해석된다. 유교적 상장례에 의해 조상숭배적 상장례의 절차를 따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비유교적 영혼관에 의한 절차가 혼합되어 있는 것이다. 곳에 따라서 장례를 다 치른 다음에 무당을 불러 씻김굿이나 자리걷이와 같이 살던 집을 깨끗이 정화하는 사자의례적 절차를 행하기도 하는 것이다.
성리학적 상장제의 묘제는 기본적으로 토광묘와 목곽묘의 혼합형태를 보이고 있다. 곳에 따라 석관을 사용하기도 한다. 즉 토광을 남북장축으로 파고 관을 넣은 다음에 횡대라고 하여 몇 개의 판자로 토광을 덮고 있기 때문이며, 또 그 위에 석회로 단단히 다져 마치 그 형태가 곽과 같은 모습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가례》에서는 부정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풍수지리설에 의해서 길지로 생각되는 곳에 조상의 시신을 모심으로써 후손들에게 발복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풍수지리를 잘 아는 지관이나 지사가 반드시 상장례의 절차를 참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6. 결 론
고고학적 자료나 역사적 기록자료를 통해서 보았을 때, 우리 나라의 상장례는 사자의례와 조상숭배가 혼합되어 행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생활조건이 불확실한 상태였던 선사시대의 단독장과 풍부한 부장품의 전통은 사자의례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한 전통은 권력집단이 등장하면서, 돌을 이용하여 권위의 표시와 함께 죽음의 세계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사용하면서, 죽음에 대한 관념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승과 저승을 왕래하는 문이나 방의 형태를 만들어 이승과 저승을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죽음의 세계는 이승과 단절된 두렵고 꺼리는 세계가 아니라 죽음을 이승에 받아 들이고, 한편으로는 이승과 이어지는 세계라는 인식이라고 하겠다. 그 다음부터는 중국문화의 영향이 우리나라에서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중국에서의 일반적인 죽음관은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흔적은 도교적 관념에서 엿보이는데,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저승을 이승과 동일하게 보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관념에서 나타나는 것이 낙랑의 고분들이며, 그 대표적인 증거로 벽화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단독장과는 달리 복수장으로서, 가족단위의 묘제와 함께 이승에 대한 모든 생활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저승의 집이라는 관념으로 무덤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사자의례의 모습은 고구려에 들어와서는 그대로 유지되어 3년상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리고 낙랑의 영향을 받아 위의 3계통이 뒤섞인 상장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고구려의 석실묘는 사자의례에서 조상숭배의례로 이행되어 가는 과도기적 상장례의 묘제로 등장하면서, 권력을 가진 계층의 묘제로 정착되어,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왕릉의 기본 묘제로서 전통을 잇고 있다. 고구려의 상황은 백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백제의 고분들도 대부분이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이고 있으며 3년상제도 그대로 시행되고 있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고신라의 경우는 적석목곽분과 함께 사자의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나, 불교의 수입에 의해 화장제가 등장하면서, 죽음관 또는 영혼관에 큰 변화를 보이면서, 죽은 후에도 이승의 문제에 깊이 관여하고자 하는 사상이 나타난다고 하겠다. 그 대표적인 예로 문무왕이 동해의 바위에 수장되어 호국용이 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왕릉도 대부분 석실분으로서 고구려 묘제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유교식 상장례의 시행과 함께 본격적인 조상숭배의례가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사상적 특수성에 의해서 사자의례와 함께 도교ㆍ불교ㆍ유교식 상장례가 공존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무속을 바탕으로 한 사자의례는 일반서민계층에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권력층에서는 도ㆍ불ㆍ유교적 상장례가 혼합되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왕릉은 여전히 고구려 계통의 석실분이 중심이 되어 있되, 그 배경으로 영생불사의 도교사상과 조상숭배의 유교사상이 혼합되어 작용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말에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여묘제와 함께 조상숭배사상에 의한 상장례가 강력히 장려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권력층에서는 불교배척과 함께 사자의례ㆍ도교사상ㆍ불교적 상장례를 강력히 비판하는 경향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법제화되어 조상숭배에 의한 상장례, 특히 성리학적 상장례가 보편화되었다. 조상숭배에 의한 상장례의 특징은 초혼과 함께 조상의 신주를 이승에 모시는 상청과 사당이 중심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당을 건립할 수 없을 때에는 단지 신주만을 4대 동안 모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상청은 3년간 일상생활 공간에 모시는데,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드리고 삭망에 상식을 올리는 등 죽은 조상을 살아 있을 때처럼 모시는 장소로서, 조상숭배의례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전래와 함께 일제 때부터 나타난 현대적 도시 생활양식에 의해 이러한 조상숭배의례는 점차 그 영향력이 감소되어,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있다. 따라서 근대적 화장이 도시지역에서 성행하고 있으며, 3년 탈상은 형식적으로만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1934년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공고한 ‘표준의례’와 함께 1968년에 정부에서 공표한 ‘가정의례준칙’에 의하여 조상숭배의례는 대폭 간소화되어, 지금은 사자의례도, 조상숭배의례도 아닌 의례가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 형식과 절차는 대폭 간소화되고 조상숭배의 핵심도 사라졌지만, 조상숭배사상은 아직도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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